1.복음에 대한 이해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18~19장을 깊이 있게 다루면서, 특히 "요한의 세례만 알았던" 아볼로의 사례와 에베소 제자들의 예를 통하여 교회가 가져야 할 '온전한 복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온전한 복음이란, 단순히 죄를 회개하고 물로 씻는 '요한의 세례'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죄 사함, 그리고 성령의 내주까지를 아우르는 구원의 전체 과정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개인과 교회가 완전한 거듭남을 경험하고, 능력 있는 공동체로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핵심 가르침이다.
그가 사도행전 18장 후반부와 19장 전반부에서 유독 주목하는 인물은 아볼로이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성경에 해박하고 학문적 능력이 뛰어났으며, 예수에 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요한의 세례만 알았을 따름"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나타난 근본적 변화, 곧 성령 강림으로 인한 교회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설교를 들었을 때, "이 사람은 구약과 회개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닌 완전성, 그리고 성령의 역사까지는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구나"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에 그들은 아볼로를 따로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주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교회가 반드시 인지해야 할 복음의 온전함'이라는 관점에서 풀이한다. 교회 지도자나 설교자가 아무리 성경 지식이 뛰어나고 탁월한 언변을 갖추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이후 부어 주시는 성령의 역사까지 충만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결핍이 있는 복음'을 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결핍은 겉으로 볼 때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질 수 있으나, 실제로 교회가 성장하고 성도들이 깊이 있는 영적 체험을 하며, 세상에 영향력을 주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을 크게 막아 선다. 아볼로는 훗날 바울조차 높이 평가하는 지도자가 되었고, 고린도전서 3장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바울과 함께 중요 인물로 언급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아볼로의 변화 과정을 통해, 부족함이 있던 지도자가 '온전한 복음'을 깨닫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함으로써 교회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게 됨을 역설한다.
이 문제는 사도행전 19장 초반부에서도 확장된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어떤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질문하자, 그들은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답한다. 이는 그들이 구약적 배경 내지는 요한의 세례만을 알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는 개념에 충분히 이르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바울이 "그렇다면 너희가 받은 세례가 무엇이냐?"라고 묻자, 그들은 요한의 세례라고 대답한다. 바울은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고, 자기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했다. 그분이 곧 예수다"라고 설명한 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도록 한다. 그 결과 이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등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수가 열두 명쯤 되었다고 사도행전 19장은 기록한다.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요한의 세례에 머무르는 교회와 성도의 상태"가 무엇인지 분명히 지적한다. 요한의 세례는 물론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것은 인간이 죄를 깨닫고 물로써 씻음을 받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라는 의식을 드러낸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완전히 이룬 사건,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나타난 구속사의 새로운 단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다면, 그것은 '복음의 절반'만 이해한 상태다. 복음의 절반만 이해한 상태에서는 성도와 교회가 갖추어야 할 능력과 열매를 충만하게 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죄 사함과 성령을 통한 거듭남의 체험, 그리고 성령의 권능이 실제로 삶에 임해야만 교회가 참된 하나님의 공동체로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요한의 세례가 지닌 의미와 한계를 밝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아 죄 사함과 성령 임재를 누리는 완전한 구원의 길을 강력히 주장한다. 이것은 단지 사도행전 18~19장에 국한된 해석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회개하라"라는 도덕적 호소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죄 사함을 가져다주며, 성령이 어떻게 각 성도와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지까지 온전히 가르쳐야 함을 뜻한다. 요한의 세례만 아는 상태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성령 세례의 충만함으로 나아갈 때, 교회는 비로소 '온전한 교회'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핵심을 반복해서 강조하며, 이것이 곧 초대교회를 부흥케 한 원동력이라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왜 이 온전한 복음이 교회를 살리고 부흥케 하는가? 장재형목사는 "성령의 역사"에 주목한다. 요한의 세례만 아는 이들은 회개와 물세례를 통해 겉으로는 정결함을 표하지만, 여전히 자기 힘이나 노력으로 신앙 생활을 꾸려 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이 임재하면, 더 이상 인간의 의(義)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과 거듭난 삶으로 인해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 안에서 교회와 성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전도와 선교, 그리고 공동체 내부의 사랑이 살아 움직이며, 병든 자가 치유되고 귀신이 쫓겨나며, 세상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는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 지역에 드러난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즉, 요한의 세례 수준의 회개만으로는 부족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역사가 임했을 때 에베소 교회가 전혀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고, 사도행전 19장 20절이 말하는 대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이루어진 죄 사함과 성령 강림의 진리를 "온전히 전수받고 체험해야만" 강력한 교회가 서고, 그것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 이후로 초대교회가 지닌 가장 분명한 표지였음을 재차 주지시킨다. 특히 오늘날 여러 교회가 프로그램이나 조직 운영, 혹은 이벤트성 행사로 성장하려고 애쓰지만, 정작 이 '온전한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온전하게 가르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한다. 장재형목사에게 있어서, 사도행전 18~19장은 그런 교회에 대한 하나의 구체적 지침으로, "교회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를 되새겨 보게 하는 경종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아볼로 같은 지도자가 현재 교회 내에 얼마나 많은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성경 지식이 해박하고, 강단에서 뛰어난 언변으로 성도들을 매료시키며, 현대적 유행과 교리적 담론에 정통해 있어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그리고 성령 임재의 의미를 삶으로 체험하고 가르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요한의 세례'만 아는 상태라는 것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더 깊은 자리로 이끌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역사를 전해 준" 사건처럼, 교회가 지닌 사명은 이런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바르게 인도하여, 진실로 온전한 복음을 체득하게 만드는 데 있다.
장재형목사는 궁극적으로 교회가 요한의 세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로,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옮겨 갈 때, 사도행전이 기록한 것처럼 수많은 영혼이 구원에 이르고, 세상은 교회가 보여 주는 능력과 사랑으로 인해 변화를 경험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바라보는 교회의 사명이며, 사도행전이 말해 주는 교회사의 핵심이기도 하다. 아볼로와 에베소 제자들의 변화를 통해 드러나는 복음의 힘은 현대 교회가 재발견해야 할 근본적 가치를 여실히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적 전환은, 결국 교회 내 분열이나 미숙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길이 되며,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온전한 교회의 회복"이라고 강조한다.
2. 성령의 은사, 교회 공동체의 다양성
장재형목사는 복음의 온전함뿐 아니라, 복음 안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가 '어떠한 열매와 은사로 나타나는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사도행전 19장에서 방언과 예언이 나타나자, 이를 특정 은사만이 구원의 표지라거나 성령의 임재 유무를 가르는 절대적 근거로 삼으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14장을 통해, 바울이 다양한 은사와 교회 공동체의 사랑의 윤리를 어떻게 제시했는지를 해설하면서, 현대 교회가 은사 문제로 분열되지 않고 서로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 19장에 따르면, 에베소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의 안수를 받자 성령을 받았고, 방언과 예언을 했다. 과거에도 이 본문을 근거로 "방언은 곧 성령의 필수 증거"라고 주장하는 진영과, "방언은 하나의 은사일 뿐이지 구원의 표지는 아니다"라는 주장이 대립해 왔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성령이 임하자 방언과 예언이라는 현상이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방언이나 예언만이 성령의 유일하고 보편적 증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그 근거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다양한 은사(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통역 등)를 제시하면서, 성령은 한 분이지만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분의 임재를 드러내신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특별히 주목하는데,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는 바울의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이미 성령의 역사 안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방언을 하느냐 못하느냐, 예언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성령 받았음을 판단하는 절대 잣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은 방언이나 예언 등 특정 은사를 지나치게 숭상하여 교회 안에서 우월감을 갖거나 분파를 만드는 것을 강력히 경계했다. 고린도전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여러 파벌로 나뉘었고, 은사 문제에서도 과도한 자랑과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 양상이 바로 현대 교회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교회마다 은사를 강조하는 양상이 다른데, 어떤 교회는 방언을 최상위로 두고 그 은사를 받지 못하면 신앙을 의심받도록 만드는 풍토가 있고, 다른 교회는 예언이나 치유 사역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성도들이 오로지 초자연적 현상에만 목말라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했듯, 은사는 서로를 세우고 유익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누구의 능력이나 신령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리고 12장 말미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하며, 13장에서 바로 '사랑장'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은, 교회가 은사를 여러 갈래로 발휘하면서도 그 중심에는 절대적으로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함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렇게 다양한 은사가 조화를 이루며 사랑으로 수렴되는 교회가,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공동체라고 설명한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방언과 예언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모든 교회가 그와 똑같은 형태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다양성'을 오히려 무시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하는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 은사도 여러 가지'라는 바울의 교훈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어떤 교회 안에서는 방언이 활성화되기도 하고, 다른 교회 안에서는 가르침과 치유 사역이 두드러질 수 있으며, 또 다른 곳에서는 섬김과 봉사가 뛰어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성령이 베푸시는 다양성'으로 이해될 때, 교회는 분열이 아니라 협력의 길을 걷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자가 이미 성령 안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해설이다.
그렇다면 왜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이 안수하자마자 방언과 예언이 터져 나온 것일까?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에베소라는 지역적·영적 상황 속에서, 성령이 주시는 표적이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에베소는 마술과 우상 숭배 문화가 만연했던 대도시로, 사람들은 각종 신비 체험과 미신적 행위를 통해 신적인 능력을 확인하길 원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복음의 진정한 능력이 드러나려면, 확실한 '성령의 표적'이 필요했을 수 있다. 그래서 방언과 예언 같은 즉각적인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는 요한의 세례에 머무른 제자들이 진정한 의미의 예수 그리스도 복음과 성령의 권능을 경험하게 하는 동시에, 에베소 전역에 "새로운 신적 권능이 임했다"는 사실을 공표하는 기능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어느 지역 교회든 성령을 받으면 방언과 예언을 무조건 해야 한다"는 교리가 될 수는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장재형목사는 고린도전서 12장 이하의 가르침이 사도행전 19장에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와 결코 상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고린도 교회가 성령 은사를 자랑하거나 비교하는 데서 분쟁이 일어났듯, 현대 교회도 방언·예언·치유·지혜·지식·봉사 등 어떤 은사를 특별시하고 절대화하는 순간 교회가 불안정해진다. 교회는 사랑 안에서 서로 다른 은사를 인정하고, 그 다양한 은사들이 함께 기능을 발휘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가는 데 쓰임받을 때 비로소 성령의 충만함을 '진정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온전한 성령 공동체"라고 부르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다양한 은사가 한 몸을 이룰 때, 교회가 초대교회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소주제 3: 바울의 에베소 사역과 두란노 서원, 그리고 현대 교회 교육의 핵심 과제에 대한 장재형목사의 적용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두란노 서원을 열고 2년 동안 날마다 말씀을 강론한 사건을 교회 교육의 모범 사례로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교회가 단순히 주일예배 설교 한 번으로 성도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키고 제자도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안일한 관점이다. 초대교회의 폭발적 부흥과 강력한 영향력 뒤에는 두란노 서원에서의 체계적이고 일상적인 교육이 있었다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사도행전 19장 8~10절을 보면, 바울은 처음에는 회당에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했지만, 그곳에서 반대와 비방이 심해지자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했다. 그리고 그 기간이 '두 해' 정도 이어졌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아시아에 사는 모든 이들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 지역의 핵심 도시였고, 인구도 많았으며 종교·문화적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두란노 서원'이라는 일종의 교육 기관을 운영하면서 꾸준히 말씀을 가르치고 토론했다는 사실은, 교회의 성장 동력 중 하나가 '체계적인 성경 교육'이었음을 방증한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교회가 이 장면을 긴급하게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들어 수많은 교회가 일주일에 한 번의 설교와 소그룹 정도로 신앙 교육을 대체하려 하는데, 이는 초대교회가 보여 준 "날마다"의 교육 패턴과 거리가 멀다. 물론 현대인은 직장·학업 등 바쁜 일상에 쫓겨 살기에 매일 교회에 모이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교회가 주중 교육 프로그램이나 온·오프라인으로 성도를 양육할 수 있는 여러 경로를 발굴해 활발히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이 사도행전 19장에서 보듯 '날마다 말씀을 듣고 토론하며 훈련받는' 은혜를 전혀 누리지 못하고 주일예배 한 번으로 신앙이 완성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머무르게 된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했다'는 한 마디 표현 속에 깊은 의미를 담는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훈련'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한다. 바울은 에베소에 안착해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전적 몰입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의 마술 책을 불사르기도 하고(행 19:19),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으려던 스게와의 아들들이 참패를 겪음으로써(행 19:13~16)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진정한 권능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에베소 교회는 아시아 전체에 선교적 영향력을 끼치는 거점이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대해 "말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교회는 힘이 없고 분열하기 쉽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말씀을 배우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는 교회는 상상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두란노 서원 같은 교육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다고 덧붙인다. 물론 오늘날에는 과거와 달리 인터넷, 멀티미디어, 디지털 기기 등 다양한 소통 수단이 있으니, 두란노 서원과 똑같은 형태로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날마다 강론하던 태도', '복음의 핵심을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토론하며 실천하도록 이끄는 방식'은 시대를 막론하고 통용되어야 할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라고 역설한다.
또한 바울이 틈틈이 텐트 메이킹을 하며 자비량 사역을 감당했고, 그 땀 흘린 헌신이 담긴 손수건과 앞치마로 병든 사람이 치유된 일(행 19:11~12)은, 말씀 교육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의 헌신과 수고가 결합될 때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함을 보여 준다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에베소에서는 단순한 이론 교육뿐 아니라, 바울의 자비량 노동과 헌신, 그리고 성도들의 삶 속에서의 실천이 어우러짐으로써 마술과 우상 숭배로 병든 사회에 치유와 해방을 가져왔다. 이는 현대 교회 역시 단순히 지식 교육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적 삶의 모범을 함께 세워 가야 한다는 암시를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말씀 교육과 삶의 헌신이 만나야 교회가 땅에 발을 붙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능력을 발휘한다"라는 표현으로 요약한다.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던 메시지의 구체적 내용은 사도행전이 상세히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그것이 사도행전 20장에 나타난 바울의 고별설교,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 보내진 편지(에베소서) 등에 함축적으로 드러난다고 본다. "은혜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 "성령의 새롭게 하심", "교회의 지체됨과 사랑 안에서의 연합", 그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라"는 에베소서 6장의 교훈은,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이 강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특히 에베소서가 "교회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우려 한 점을 생각해 보면,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이 성도들을 철저히 가르쳐 교회를 교리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든든히 세우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온전한 복음", "성령의 다양한 은사", 그리고 "집중적 교육"이 삼위일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초대교회가 보여 준 역사가 재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숫자를 불리기 위해 가벼운 행사를 반복하거나, 사회적 명성에만 집착하여 '심층적 교육'을 포기해 버리면, 결국 요한의 세례 수준 혹은 피상적 은사 체험에 만족하는 결핍된 교회가 되고 만다. 그러나 두란노 서원 모델을 따르듯, 교회가 날마다 복음을 깊이 나누고,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며, 사랑으로 서로를 세우고, 헌신적 삶을 실제로 보여 준다면, 예루살렘 교회나 에베소 교회가 겪었던 부흥을 현대 교회도 누릴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적용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지역교회가 '성도들을 평생 제자로 훈련하는 교육 사역'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만 혼자 애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전체적으로 "우리는 두란노 서원을 운영하는 마음으로, 혹은 정신으로 이 시대를 살겠다"라는 결단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작은 교회라도 매일 혹은 자주 성경 공부를 열고,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해 교재를 공유하고, 목회자와 교사가 성도들과 질의응답을 자주 하며, 가르치고 토론하는 문화를 조성해 가야 한다. 큰 교회라면 신학교나 교육 기관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사도행전 19장이 보여 준 교육 패턴, 곧 "날마다 강론했다"는 정신에 닿아 있어야만 참된 제자도를 이루고 교회를 강건하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서로 교제하고 적용하는 노력 없이, 어떻게 초대교회 같은 능력을 바라겠는가?"라며, 교회들이 이 사안을 다시 점검하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정리하자면,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19장을 중심으로, 두란노 서원 사역이 에베소 교회와 소아시아 선교에 불러온 혁신을 조명하며, 이것을 현대 교회가 새삼스럽게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아니라, 복음을 온전히 전하고, 성령의 은사를 다양하게 인정하며, 날마다 말씀을 교육하는 교회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직접 체험하자는 도전이다. 그리고 그 모든 가르침의 밑바탕에는, "요한의 세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온전한 복음," "성령의 은사를 둘러싼 다양한 형태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통합하는 교회,"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말씀 교육과 헌신이 결합된 공동체"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결론이 놓여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왜 능력이 없고 세상에 끌려다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주로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회개나 의식적 종교생활만을 강조해 요한의 세례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특정 은사나 현상만을 우상화하여 분열과 경쟁이 일어나거나, 교육을 등한시하고 주일예배 설교만으로 모든 것을 대체해 버린다면, 결코 에베소 교회나 초대교회 같은 거룩하고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스스로를 점검하여,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을 온전히 전하고 있는가? 다양한 은사를 사랑으로 수용하며 서로를 세우고 있는가? 주일 하루뿐 아니라 날마다 강론하며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답변 속에서 부족함을 발견한다면, 지금부터라도 두란노 서원과 같은 장(場)을 마련하여 바울이 했던 일들을 다시 해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열리는 것이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로 귀결된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사도들의 열정만으로 가능해진 것도 아니다. 그 뒤에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와 더불어, 날마다 말씀을 연구하고, 사랑 안에서 은사를 나누며, 모든 삶을 통해 헌신하고 제자화하는 체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결실로, 에베소라는 도시가 변하고, 소아시아 전체가 복음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는 일이 벌어졌다. 현대 교회도 이런 '온전한 교회'의 길을 택한다면, 비슷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결론이다. 그는 이를 두고 "우리가 말씀을 바르고 깊이 있게 가르치고, 성령의 지시를 온전히 따르며, 각종 은사를 사랑으로 나눌 때, 능력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 애써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낼 필요가 없고, 인위적으로 교인 수를 늘리려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친히 사람들을 붙여 주신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 성장의 비밀이다"라는 언급을 자주 한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18~19장이 현대 교회에 주는 메시지가 결코 '과거 이야기에 불과한' 사건이 아니라고 거듭 말한다. 그 안에는 아볼로처럼 학식과 열정을 갖추었으나 복음의 온전함이 빠진 지도자, 에베소의 열두 제자처럼 회개하고도 성령을 몰랐던 이들, 두란노 서원에서의 날마다 교육, 바울의 자비량 봉사와 기적, 그리고 스게와의 아들들처럼 예수의 이름을 흉내 내려다 실패한 사례 등, 교회가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측면이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에피소드가 하나로 흐르며 보여 주는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죄 사함, 성령의 능력과 다양한 은사, 매일의 말씀 교육과 사랑의 공동체가 만나면 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에게,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회복해야 할 핵심 DNA다. 이 DNA가 부재할 때, 아무리 대형 건물을 세우고 재정이 풍족해져도, 교회는 생명력이 사라지고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기며 세상 물결에 휩쓸릴 위험이 높아진다. 그는 교회 구성원들, 특히 리더십을 가진 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롭게 인식하고, '두란노 서원 정신'을 되살려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성령의 은사를 다양한 형태로 인정하고 격려하는 훈련을 매일매일 반복할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곧 사도행전이 말하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진정한 회개를 이끄는 역사를 이어 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 18~19장을 중심으로 펼쳐 나가는 모든 메시지의 주된 골자이며, 오늘도 그의 설교와 강연에서 일관되게 들려오는 핵심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