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의 마지막 사랑의 권면
요한복음 13장 20-30절의 말씀에서 우리는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는 구절과 함께,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모습을 매우 생생하게 마주하게 된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나눈 마지막 만찬 장면 가운데 펼쳐지며, 그 안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극진한 사랑의 권면과 이를 끝내 거부하는 유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인간의 자발적인 결단과 회개를 강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깊이 있게 강조한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도록 억지로 조종하실 수 없다"는 사실은, 사랑이라는 본질 자체가 강압이 아닌 자유로운 선택 위에 선다는 대전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라는 선물 앞에서 사람이 보여주는 반응이 어떠한지를 유다의 사례로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떡 한 조각을 직접 유다에게 건네주신 행위는, 그저 식탁 교제에서 흔히 있을 법한 단순한 동작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면, 누군가에게 떡을 직접 떼어 내미는 것은 특별한 사랑과 존중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그만큼 예수님은 유다를 마지막까지도 품고자 하셨고, 어느 누구보다 가까운 위치에 앉혀서 진심 어린 마음을 전하고자 하셨다. 이 과정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건도 함께 진행된다. 그 시점까지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행보는 철저한 '섬김'과 '권면'의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제자들은 이러한 모습에 감동하며 눈물짓고, 또 어쩌면 주님의 말씀을 곰곰이 곱씹으면서 자신들의 메시아관(觀)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미 마음 깊숙한 곳에 배반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주님께서 가장 가까이에 두신 제자가 주님을 팔았다"는 점을 통해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우리의 내면을 강조한다. 유다는 그 무엇보다 '돈'을 맡은 자였다. 유대인 공동체, 특히 메시아 공동체에서 금전을 관리한다는 것은 큰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보통 돈은 유혹의 소지가 많고, 다툼이나 분쟁의 발단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책임감과 영적 성숙을 겸비한 사람에게 맡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돈궤를 유다에게 맡기셨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유다를 깊이 신뢰하고,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책임감과 믿음을 가졌으리라 보았다는 것을 뜻한다. 장재형목사는 "주님은 끝까지 유다를 믿으셨다"는 식으로 해석하며, 이 믿음은 결코 억지나 미끼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에게는 "절대적 사랑의 예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세속적 욕망과 삐뚤어진 시각으로 인해 주님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건은 이러한 유다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어떤 여인이 지극히 값비싼 향유가 들어 있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렸을 때, 그 순수한 사랑의 표현을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그 비용을 썼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라는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시각으로 폄하했다. 물론 그 말 자체만 놓고 보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나쁘다거나 틀린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을 사랑으로 보지 못하고, 경건의 핵심이 예수님께 대한 전심 어린 헌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계산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길은 세상적으로 볼 때 어리석어 보이거나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길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며, 자기희생을 통한 구원의 길이다. 유다는 이 길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이해하기를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장재형목사가 보기에, 바로 그 지점이 유다 안에 자리한 '뱀보다 흉측한 죄성'이 드러나는 곳이다.
주님의 마지막 만찬 장면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서로 보며 의아해했고, "도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일까?" 하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구체적으로 그 배반의 주인공이 '유다'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폭로하지는 않으셨다. 대신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며, 직접 한 조각을 유다에게 건네신다. 이 행위는 배반자를 폭로하는 동시에, 그에게 마지막까지 사랑을 베푸시는 상징적 행동이다.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준다는 것은 친밀감을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유다에게 주어졌을 때는 동시에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나는 네 마음속에 있는 일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돌이키라. 이 떡을 통해 다시 한번 돌아오라.'라는 초대다. 그러나 유다는 그 초대를 외면한 채, 조각을 받고 곧 밖으로 나가 버렸다.
요한은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고 기록한다. 이 '밤'이라는 표현은 단지 시간적 배경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유다의 영적 상태와 세상의 암흑이 실체화되어 나타나는 이미지를 함께 담아낸다. 밤은 어둠이고, 숨김이고, 죄와 타락을 상징하는 시간이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홀로 그 길을 걸어가시게 되는 결절점이기도 하다. 사랑의 권면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간, 배반이 현실화되는 시간, 영적인 어둠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는 시간이 바로 이 밤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밤'의 의미가 단순히 시간적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는 모든 영혼의 어둠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즉,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 역시 이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 본문에서 제자들이 보여주는 태도 또한 주목할 만하다. 유다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며, 몇몇은 "아,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니 명절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가나 보다"라든지 "가난한 자들에게 무언가를 나누어주러 가나 보다"라고 추측했다. 그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유다의 마음 한가운데 만연해 있던 배반의 씨앗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 내에서도, 심지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형제자매일지라도 서로의 영적 상태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하고 서로를 살피며, 은혜 안에서 진실한 교제를 나누어야 함을 역설한다. 사랑의 공동체라 하더라도 영적 무지와 무관심이 겹치면, 그 안에 도사린 위기가 감지되지 않고 커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다의 배반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앞서 언급한 옥합 사건을 보면, 결국 유다는 세상의 논리에 빠져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또 보려 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과 권면을 들어도 자신의 욕망과 편견으로 재단하려 했으며, 그 결과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과 헌신을 오히려 '낭비'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결정적으로 그는 예수님께서 꿈꾸시는 하나님 나라가 자신이 기대했던 정치적 해방이나 세속적 영광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자신을 낮추는 섬김의 리더십, 죄인과 가난한 자를 향한 관용,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향해 가는 희생적 태도는 유다가 바라는 혁명적 리더상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보였을 수 있다.
유다는 마지막 기회까지도 주님의 사랑을 거부한다. 그가 떡 조각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은, 곧 "그의 선택이 확정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랑은 강제하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하나님의 고통'으로 풀어낸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인간이 스스로 죄를 선택하고 배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그대로 바라보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지만, 그것을 끝까지 외면하는 자는 결국 영원한 어둠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그 어둠의 문턱에서 예수님께서 끝까지 내미시는 손길을 가차 없이 뿌리치는 유다의 완고함을 보게 된다.
우리가 유다를 통해 단순히 "어떤 극악무도한 배반자 한 사람이 있었다"로만 단정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유다의 모습은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도 자리할 수 있는 어둠의 단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교회에 다니고, 말씀을 듣고, 섬기고, 봉사하며 지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한편에 세속적 기준으로 주님의 일하심을 재단하려는 태도가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스스로 한계를 느낄 때,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이건 아니지 않나? 좀 더 실용적인 방식으로 해야 하지 않나?'라는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로 사랑의 행위를 평가절하할 수 있다. 또한 직분과 사역, 재정 관리를 맡은 자일수록 더욱 겸손히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유다가 '돈궤'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타락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다의 배반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대한 경종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이 선포되고, 회개와 돌이킴을 촉구하는 마지막 기회가 늘 주어지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외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시지만, 끝내 돌아서지 않고 어둠으로 나아가려는 자를 막지 않으신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우리가 늘 경각심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자리는 늘 유다가 떡 조각을 받은 자리와 같다. 그것이 우리를 살릴 수도 있지만, 동시에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렇듯 요한복음 13장에 등장하는 최후의 만찬 장면은 주님의 사랑의 절정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배반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 두 양극 사이에 '돌이킬 기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했지만, 그는 결국 회개하여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유다는 그러지 않았다. 베드로의 부인은 두려움과 연약함에서 비롯되었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그래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눈물로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유다는 스스로의 야망과 욕망이 깊이 자리하여, 배반을 사전에 계획했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다. 이 배반은 회개와 돌이킴이 아니라 절망과 자살로 끝이 났다. 이렇듯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죄의 역사는 참으로 깊고 무섭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비극적 가능성임을 보여준다.
또한 만찬을 둘러싼 제자들의 모습에서, 유다가 밖으로 나가는 순간까지도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가를 일깨워준다. 장재형목사는, 제자들이 만약 유다의 상태를 조금 더 면밀히 살피고,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이상 징후를 감지했다면, 더 빨리 그를 붙들고 회개하도록 권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지 못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우리의 현실과도 같다. 우리 곁에서 누군가 깊은 절망에 빠지고, 죄의 유혹에 무너지며, 결국은 교회를 등지고 세속의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눈치채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그래서 늘 말씀과 기도로 서로를 돌봐주고,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깊은 어둠에 빠지는 일을 방지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 공동체의 연약함이다.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열린 두 팔로 우리를 초대한다. 요한복음 13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임을 뜻한다. 그리고 유다가 이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스승을 배반한 것을 넘어 하나님을 영접하기를 거부한 행동이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그 누구도 주님의 마음을 강제로 뒤집을 수 없다'고 해석한다. 사랑은 상대방의 자유로운 결단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기에, 유다가 끝내 돌아서지 않는 것을 예수님도 억지로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다의 예에서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것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든지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그 기회를 영원히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유다는 분명히 마지막 만찬에서 떡 조각을 받았고,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의 표적을 직접 목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고치지 않고, 최후의 기회까지 저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영적 어둠이 인간 내면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두려운 모습이다. 그리고 결국 어둠이 임하자, 그의 영혼은 회복되지 못할 절망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이처럼 요한복음 13장이 보여주는 유다의 배반 사건은, 단순히 과거 제자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비극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매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혹은 외면하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성찬의 떡처럼 매 순간 받고 있다. 말씀을 통해, 공동체의 예배를 통해, 선포되는 복음을 통해, 서로 나누는 사랑의 교제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돌이켜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유다처럼 영적 무지나 완고함에 사로잡혀 그 모든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음을 늘 자각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일종의 '하나님의 무력함'으로 표현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 앞에 무력해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력함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가장 극적인 표현이다. 강제로 우리를 복종시키기보다, 스스로의 결단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는 요한복음 13장 30절은,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하루에도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하는 인생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권면을 따라 돌이킬 것인가, 아니면 끝내 등을 돌리고 어둠을 선택할 것인가? 그것이 유다의 배반 이야기의 궁극적인 물음이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우리 안에 유다와 같은 완고함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지,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사랑이 최후까지 우리를 향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배반이 어둠의 길을 향해 가는 선택이라면, 사랑은 빛의 길에서 우리를 붙잡는 초대다. 이 둘 중 어느 길을 갈 것인가 하는 결단은, 오롯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
2. 영적 무지와 회개의 기회
유다가 배반의 길을 걸어갈 때, 제자들은 전혀 그 배반의 분위기를 읽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고 직접적으로 경고하셨음에도, 그들은 서로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일까?'라고 수군거릴 뿐이었다. 심지어 예수님이 떡 한 조각을 적셔 유다에게 주실 때조차, 제자들은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유다가 밖으로 나가 버리자, "아마 무언가를 사러 갔겠지" 또는 "가난한 자들을 도우러 가겠지"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영적 무지는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린다. 이는 고대 제자 공동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의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영적 위기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넘길 때가 많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영적 긴장감과 깨어 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이미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상징적으로 행동하심으로써 배반의 그림자를 드러내 보이셨다. 발을 씻기시며 '너희가 서로 섬기라' 하셨고, 옥합을 깬 여인의 헌신을 통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최후 만찬 직전에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라고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사랑의 의미와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곱씹지 못한 상태였기에, 유다의 배반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데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이는 곧 사랑이 식었을 때, 또는 영적으로 둔감해졌을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늘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에도, 그분의 의도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고, 심지어 공동체 내부에 잠재한 죄의 씨앗을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제자가 유다의 마음을 미리 알고 막을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최소한, 예수님께서 간접적으로나마 암시하시는 배반의 징후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유다를 향해 더 많이 관심을 기울이고 붙들려고 시도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사랑의 공동체가 가져야 할 태도일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누군가가 믿음의 길에서 멀어져 가거나, 세속적 욕망에 깊이 사로잡혀 가고 있다면, 그를 섣불리 판단하고 배제하기보다, 어떻게든 끝까지 품고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다른 사람의 영혼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빠져들어가는 죄의 어둠은 결코 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가 배반의 길로 나아가면서도, 제자들이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유다가 그만큼 공동체 내에서 '신뢰받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돈궤를 맡길 정도로 신뢰받았던 인물이, 내부의 죄를 품고 타락할 수 있다는 건 우리에게 '신앙적 지위'나 '직분'이 죄로부터의 면역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교훈을 준다. 오히려 직분과 역할이 클수록 더 큰 유혹에 노출될 수 있으며, 넘어졌을 때 미치는 파장도 커질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교회 지도자나 사역자일수록 깨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확장한다. 왜냐하면 직분과 명예 뒤에 숨어, 자신 안에 도사린 죄성과 세속적 욕망을 쉽게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유다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동체의 신뢰를 끝까지 등지고 밖으로 나가 버린 장면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말씀의 자리'는 떡을 떼어주시는 자리이자, 우리가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의 자리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유다가 떡 조각을 받은 그 순간,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 조각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다시 말해, 유다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회개와 구원의 신비가 깃든 지점이다. 사람은 극도의 절망과 죄의 사슬에 얽매여 있어도, 어느 한순간 스스로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기적처럼 변화될 수 있다. 그런데 유다는 그 기적의 순간을 외면했다. 떡을 받은 즉시 밖으로 나갔고, '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는 곧 자신이 완고함의 길을 택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의 죄성을 끝까지 붙들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무서운 결론을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신앙의 파멸이다. 유다는 주님을 향한 배반뿐 아니라, 그 후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말을 맞이했다.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돌아섰다면, 베드로처럼 다시금 용서받고 회복의 길을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유다는 모두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한 꼴이 되었지만, 한 사람은 회개하여 사도로 세워지고, 다른 한 사람은 영원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죄의 무서움보다 더 두려운 것은 회개하지 않는 마음의 강퍅함임을 가르쳐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을 강조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인간을 억지로 회개시키고 돌이키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 안에서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인간이 죄의 길을 선택하면, 하나님은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그 선택을 막지 않으신다. 이것이 '사랑의 세계'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다. 억지로 조종하는 세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초대하되 선택은 각자에게 맡기시는 세계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히 어둠에 머물게 되는 비극적 결과도 함께 따른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만찬 자리라는 공동체적 교제의 현장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만찬은 단순히 음식을 함께 먹는 자리가 아니라, 영적으로 마음을 나누고 주님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는 자리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를 함께 나누며, 누가 크냐를 다투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섬김의 본을 보이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다시금 제자들의 마음에 새기셨다. 그뿐만 아니라, 배반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도 경고하셨다. 우리의 예배와 성찬, 교제의 자리는 이처럼 여러 면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만들어주는 기능을 해야 한다. 우리가 함께 말씀을 나누고, 서로 기도해 주며, 서로의 영혼을 살피는 과정에서, 죄의 씨앗이 잉태되기 전에 돌이키도록 권면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공동체가 할 일이다.
그러나 만찬의 따뜻함과 편안함이 오히려 우리를 방심하게 만들 수도 있다. 제자들은 편안한 식사 자리에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의 진의를 깊이 생각하기보다, 그저 당장 보이는 행위에만 주목했을 수 있다. "발을 씻어주시는 주님의 겸손,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베푸시는 은혜, 서로가 나누는 친밀한 대화" 등에 매몰되어, 정작 유다가 어둠으로 빠져드는 상황은 제대로 읽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예배와 교제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말씀을 들어도 곧 잊어버리고, 교제 속에서도 피상적인 안부만 묻고 지나칠 뿐, 누군가가 처해 있는 영적 위기나 고통을 진심으로 살피지 않는다면, 사랑의 권면은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그 영혼은 곧 어둠으로 들어가 버릴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적 거울이 되어줄 것을 호소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다. 그 사랑 안에는 상대방의 죄와 연약함을 외면하지 않고, 돌이킬 기회를 주고, 때로는 엄중히 타이르며,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결단이 포함된다. 이러한 노력이 존재할 때, 우리 공동체는 유다와 같은 영적 비극이 발생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예방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깨어 있지 않고, 서로를 살피지 않는다면, 유다는 배반의 길로 '혼자' 나가버릴 것이며, 그 어둠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늦어버리고 만다.
돌이켜 보면, 제자들은 결국 유다가 나가고 난 후에야 많은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왜 그러셨는지 그 순간에는 몰랐지만, 나중에야 모든 것이 연결되어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하는 계획을 실행하러 떠났고, 주님께서는 체포되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게 된다. 이것이 죄가 현실화되는 방식이다. 먼저 마음속에서 시작된 죄의 씨앗은, 결국 행동으로 옮겨지고, 그 행동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 초기에' 미리 살피고, 회개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요한복음 13장에 나타난 유다의 배반 이야기는, 동시에 우리에게 깊은 소망의 메시지도 함께 준다.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사랑의 끈질김 때문이다. 예수님은 배반을 알고 계셨지만, 끝까지 유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셨다. 마지막 만찬에서도 가장 가깝게 두셨고, 떡 한 조각에 사랑을 담아 건네셨다.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혹은 그 마음을 끝까지 붙들어 주고 싶으셔서 노력하셨다. 만약 유다가 그 순간에도 마음을 돌이키기만 했다면, 베드로의 실패가 회복되었듯이 유다 역시 회복될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우리도 '돌이킬 기회'를 날마다 얻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 누구도 절망에 갇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 돌이킬 기회가 영원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유다는 그 기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키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사랑이 강제될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그를 붙잡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순간 이후로 유다는 광야와도 같은 어둠 속에서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결말을 두고,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심판은 하나님 없는 고통 속에 스스로를 던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고, 자신이 만든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 곧 영적 죽음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3장 전체가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는 단순히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다"는 사건보다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과 인간의 완고한 배반이 맞부딪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 맞부딪힘의 현장은 공동체 안에서, 예배와 만찬과 말씀의 자리가 마련된 그 환경 안에서 일어난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삶이 결코 안전지대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성경 지식과 은혜로운 예배 경험이 충분해 보여도, 그 안에 유다 같은 마음이 자라고 있을 수 있다. 또한 사랑의 공동체라 불리는 곳에서조차, 진정한 관심과 영적 깨어 있음이 없다면, 그 마음은 아무도 모르게 어둠으로 곪아 들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 공동체야말로 유다가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떡 조각을 전해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있고, 함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언제라도 회개할 수 있는 창문이 열려 있었다. 우리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다. 장재형목사는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떡을 떼어주시는 은혜의 자리"라고 말한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말씀을 듣고, 성찬을 받을 때마다, 그것은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 그 한 끗 차이를 좌우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진솔하게 주님 앞에 열려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유다가 실패한 지점은 바로 그 마음의 문을 끝까지 닫았다는 데 있었다.
유다가 밖으로 나갔을 때의 그 '밤'은 단지 시간적 밤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밤은 영적 어둠, 주님 없는 자리, 사랑의 권면이 닿지 않는 완고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밤이 임하기 전, 유다는 분명 떡 조각을 받은 상태였다. 즉, 사랑의 초대가 이미 주어졌음에도, 그는 자발적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말씀을 듣고, 사랑을 나누고, 여러 기적과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결국 돌이키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유다처럼 어둠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가 된다. 동시에, "끝까지 회개하고 돌아서면, 베드로와 같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소망도 함께 제공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우리는 유다도, 베드로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는 날마다 우리 안에 자리한 그 가능성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실 것이며, 말씀으로 돌이키도록 끊임없이 권면하실 것이고,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들의 기도와 돌봄을 통해 우리를 다시 세우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모든 기회를 뿌리치고 끝내 스스로 밖으로 나간다면, 그 길은 곧 밤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위험성을 언제나 기억하며, 늘 깨어 사랑으로 서로 권면하고, 말씀으로 스스로를 비추고, 회개의 길을 걷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20-30절에 나타난 유다의 배반 사건은, 사랑의 절정과 배반의 극치가 한순간에 교차되는 비극이면서도, 그 안에 담긴 영적 교훈은 결코 무겁고 어두운 결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람의 선택 앞에 무력하게 보일 수 있음을 배운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열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자꾸만 우리식의 잣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거룩한 사랑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겸손히 회개하고 그 손을 붙드는 것"이라 역설한다. 그 손을 놓아버리면, 남는 것은 밤뿐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곧 우리에게 "항상 깨어서 자신을 살피고, 서로를 돌보며,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도 충분히 배반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누군가의 마음이 흔들릴 때 붙잡아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섬김이자 사랑의 실천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우리는 유다처럼 말씀을 계산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사랑의 행위를 세속적 시각으로 재단하지 않도록 매일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는 말씀이 우리 개인의 최종 결론이 되지 않도록, 주님의 사랑을 붙들고 끝까지 회개하며 돌아서는 길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요한복음 13장에 담긴 절절한 권면이자,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핵심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