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 교회의 출발과 성령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사도들과 함께 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 가운데 핵심이 바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행1:4-5). 이는 사도행전의 첫 장면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며, 초대교회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이는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풀었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시대가 곧 도래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당시 상황은 매우 위험하고 살벌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종교권력과 세속 권력은 기세가 등등했으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소탕하겠다고 하는 위협이 가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물러서지 않고 맞서라는 거룩한 도전의 말씀, 그리고 "너희가 가져야 할 믿음의 출발지"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그렇게 초대교회가 시작되는 지점이 되었습니다. 성전이 위치한 물리적 공간일 뿐 아니라, '복음이 흘러나가는 출발선'이라는 중요한 상징성을 가집니다.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는 이 예루살렘에서 태동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24장)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러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바로 그 약속이 성취되어,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납니다. 이 성령 강림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시대, 즉 모든 믿는 이가 하나님의 영을 받는 시대의 개막을 알립니다. 구약시대에는 수백 년에 한 번, 혹은 특정 선지자나 왕, 혹은 구별된 이에게 특별하게 임하던 성령이, 이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 '누구나' 임하게 되는 은혜의 장이 열린 것입니다. 이는 율법주의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엄청난 자유의 복음이었고, 동시에 기존 종교 권력 구조를 뒤흔드는 메시지였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성령의 시대 도래를 두고, 교회의 출발이 "피값으로 사신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세워진 것"이라는 점을 수차례 강조해왔습니다. 교회가 '건물'로서가 아닌, '주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된다는 설명입니다. 특히 사도행전 1장 8절, 즉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초대교회의 선교 패러다임을 설정해준 핵심 구절입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까지 복음이 확장되어가는 구조로 성장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가진 선교적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구조는 단지 지리적 확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게만 머물렀던 복음이 언어와 민족, 계급, 과거의 종교적 배경을 초월하여 전 지구적으로, 그리고 인류의 온 영역으로 뻗어 나감을 가리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교회는 이 명령 아래 머물며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에 언급된 것처럼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아시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라고 물을 때(행1:6),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라고 못박으셨습니다(행1:7). 그런데 바로 이어 "오직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십니다(행1:8). 이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의 초점을 '시기 예측'에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 사명, 즉 "복음 전파"에 두어야 함을 다시금 확실히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주님이 언제 오실까?"가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을 어떻게 전하며 살아야 할까?"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처럼 제자들에게 두 가지 큰 방향을 주십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기다림이란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태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머무르는 것 자체가 이미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의 위협에 맞서는 믿음의 결단이었고, 그 결단으로 인해 주어지는 은혜가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자 교회는 예루살렘이라는 '시작점'에서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온 유대, 사마리아, 이방 땅으로 복음을 확장하게 됩니다.
이때 "마가의 다락방"은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던 마가의 다락방은 성령이 임하신 현장이 됩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이 마가의 다락방이 초대교회의 모태가 되었고, 이후 이들이 흩어져 복음 전파의 중심 역할을 감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맛디아를 사도로 선택하는 일이었습니다(행1:23-26). 이 선택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공석이 된 열두 제자 자리의 회복을 의미하며, 초대교회의 거룩한 '질서 확립'의 사례로 꼽힙니다. 장재형목사는 마가의 다락방을 두고 "약속의 임재가 나타나는 곳이자, 배신으로 인한 공백마저도 회복해내는 하나님의 역사 현장"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의 또 다른 영적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바로 "진리와 사명을 시작한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말고 버티라"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죽인 세력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는, 위험천만한 공간이었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도망치거나 숨고 싶은 유혹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꾸로 "오히려 여기서 성령을 기다려라. 여기서 시작해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적용됩니다. 때때로 신앙인이 처한 현실은 '예루살렘처럼' 각종 유혹과 공격이 가득한 곳이지만, 주님은 우리가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견디는 그 자리에 성령이 임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이 곧 "교회의 시작"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장차 "종말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말하는 마지막 날의 징조 역시 예루살렘과 성전을 배경으로 전개됩니다(마24:1-3). 주님이 감람산에서 하신 올리벳 담화(Olivet Discourse)는 종말론적 메시지로 가득 차 있지요. 주님의 고난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절정을 맞이했고, 부활 후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도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기독교 신앙 역사에서 처음과 끝을 아우르는 상징이 되며, "복음의 출발점이자 완결점"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이 주님께 씌웠던 죄목인 "신성모독"과 "성전을 허무는 자"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진정한 성전이며, 우리 개개인도 성전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복음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는 주님의 말씀은 구약 제사체계와 성전 중심의 율법주의가 종말을 맞이하고,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새로운 성전이 된다는 혁신적 선포였습니다. 과거에는 건물로 된 성전 안에만 하나님의 임재가 제한된 듯 보였으나, 이제 예수를 믿는 자마다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교회가 주의 몸 된 성전으로 일어서는 전환이 사도행전에서 본격화됩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에서부터 출발하는 복음의 위력은 세상의 체제나 권력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힘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예루살렘이 갖는 '시작점의 중요성'을 자주 설파합니다. 믿음의 여정, 교회의 역사, 선교의 사명-all are rooted in that 초대교회가 서 있던 '예루살렘'의 정신에 있다는 것입니다. 흔들림이 올 때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그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편, 이는 곧 우리가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뻗어나가야 하는 발판입니다. 예루살렘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임했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 제자들은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근간, 복음의 기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굳건히 선 뒤에,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의 풍부한 영적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첫째로 예루살렘은 "신앙의 원점"이고 "교회의 태동"이며 "성령 강림의 현장"입니다. 둘째로 예루살렘은 "고난과 박해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머무르라는 주님의 명령은 고난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믿음을 지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셋째로 예루살렘이 그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이들이 '땅 끝까지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지체 없이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공동체이며,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새 시대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강조하며 "예루살렘은 우리의 한 단면이라기보다, 신앙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이라고 설교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교회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는가? 바로 다음 부분에서 '배반자 유다'와 새롭게 선출된 '맛디아'가 중요한 전환점으로 등장합니다. 유다의 배신은 교회의 상처요, 동시에 경고지만, 맛디아의 선택은 그 상처와 공백마저도 주님이 회복해 가신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성령의 역사와, 본격적으로 확장되는 복음의 힘을 살펴보면, 교회가 어떠한 존재로 자라나야 하는지가 분명히 보입니다.
2. 유다의 배반과 맛디아의 선택 - 회복과 승리의 역사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하나였음에도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기는 배반을 저질렀습니다(마26:14-16). 이는 극악한 죄였습니다. 더구나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며 돈궤를 맡아왔던 봉사자, 일종의 '재정 담당'이었습니다(요12:6). 사탄은 바로 이 돈 문제, 탐심, 그리고 권력자들과의 부패한 공조를 통해 예수님을 넘기는 자를 찾아냈습니다.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먼저 찾아갔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배신의 발단이 결코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그의 내면에 도사린 욕망이었음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결국 유다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세력은 로마 군인들과, 성전을 지키는 사두개파 중심의 세력(대제사장 안나스·가야바 등), 그리고 율법의 잣대를 휘두르는 바리새인들을 아우르는 거대한 종교·정치 연합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몰아 죽이려 했고, 성전의 권위에 도전하는 '성전 파괴자'로 낙인찍어 사형에까지 몰고 갔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 장사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 가문은 로마와도 일정 부분 결탁하여, 유대 사회의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것을 분노하시며 상을 뒤엎으셨고(요2:14-16), 이는 기득권 세력의 심기를 극도로 거슬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는 자신이 맡고 있던 재정권을 이용해 스승을 넘겼습니다. 배신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예수님의 정죄를 직접 눈으로 본 후,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고백하며 은 삼십을 다시 성전에 던져 넣었지만(마27:4-5), 그 길로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뉘우침'과 '회개'가 다르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유다는 잘못을 깨달았지만, 결국 절망과 자학으로 빠져들어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렸습니다. 반면 베드로 역시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큰 죄를 범했지만, 그는 자기를 정죄하기보다는 주님께로 돌아가 통회 자복하였고, 결국 회복의 길을 찾았습니다(요21:15-17). 이 차이는 궁극적으로 "진정한 회개는 주님을 바라보는 소망으로 이어지지만, 인간적 뉘우침은 절망으로 귀결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사도행전 1장 18-19절은 유다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고, 이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므로, 그들이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마태복음 27장에 따르면,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던져놓고 간 은 삼십을 '피 값'으로 보고,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 남겨진 흔적은 '피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파멸 속에서도, 주님은 다른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열두 사도의 공석을 채우기 위해 '맛디아'를 간택하신 일입니다(행1:23-26).
맛디아의 선택은 단순히 한 인원을 보충하는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20절에 베드로가 시편(시69:25, 109:8)을 인용하여 "다른 사람이 그 직분을 취하게 하소서"라고 언급한 점을 볼 때, 이것은 성경 예언의 성취이자, 교회의 질서를 재정비하는 영적 사건이었습니다. 열두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연관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열둘 중 하나가 빠졌을 때, 남은 열한 사도로서는 그 공백을 메우는 일이 그저 인력 보충 이상으로 중요했습니다. 또한, 이 자리에 오를 사람은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며 주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우리에게 올려 가신 날까지 동행한 자 중 하나"(행1:21-22)라는 조건을 충족해야 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공생애와 부활, 승천을 직접 목격한 자이자, 교회의 기초를 세울 만한 영적·신앙적 증인임을 요구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요셉이라 하는 바사바(별명은 유스도)와 맛디아" 두 사람 가운데 제비 뽑기로 맛디아가 선출됩니다. 제비 뽑기는 구약 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방식이었는데, 이 결정 과정에는 제자들의 기도가 뒤따랐습니다(행1:24). 그들은 스스로 누구를 뽑으려고 주도적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택하셨는지 보이시옵소서"라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행1:24). 이것은 단순히 우연에 맡긴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계산이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하나님 주권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신앙적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뽑힌 맛디아는 사도의 자리에 합류하여, 초대교회의 열두 기둥 가운데 한 명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맛디아의 간택을 두고 "회복의 역사"라 지칭합니다. 유다의 배신이 교회 공동체에 큰 상처와 혼란을 가져왔지만, 하나님은 그 상처를 그냥 두지 않으시고 새 인물을 세워 그 자리를 채우심으로써 사도 공동체가 다시 온전해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실패나 죄로 인해 중단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어긋나고 무너져도, 주님은 다시금 기회를 주시고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워, 결국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맛디아의 선출은 교회가 앞으로 나아갈 영적 동력이 되었고, 뒤이어 닥쳐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초대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행2장).
유다의 배신과 맛디아의 선택 사이에는 "봉사자"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유다는 돈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가 무너진 이유도 재정 욕심, 즉 탐심이 크게 작용했음을 복음서가 암시합니다(요12:6). 반면 사도행전 6장에 등장하는 일곱 집사, 그 중에서 스데반은 돈을 맡아 구제를 담당하는 집사로서 충성스럽게 섬기다가, 결국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행6:1-15, 7:54-60). 그는 유다처럼 돈을 붙잡아 자신의 이득을 취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거하고 생명까지 내어놓았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사울(바울)은, 이후 담회색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며 엄청난 회심의 사건을 맞이하게 됩니다(행9:1-9). 이를 통해 하나님은 배신과 실패, 죽음 같은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더 크고 선한 계획을 이어가십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넘기고 그 값을 받은 "은 삼십"은 예수님 시대의 노예 한 명을 사는 데 드는 값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간 것도 은 이십(창37:28)이었지요. 성경에서 '인간을 돈으로 사고파는 것'은 가장 극악한 죄악으로 여겨집니다. 출애굽기 21장 16절에서도 "사람을 훔쳐서 팔거나 그 수중에 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 스승을,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헐값에 팔아넘긴 것입니다. 이 배신 행위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큰 충격으로 남았고, 그래서 사도행전 초입부터 유다의 최후가 자세히 언급된 뒤 곧바로 맛디아를 세우는 장면이 연결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동체는 유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주님이 새 길을 여신다"라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1장에서 맛디아가 열두 번째 사도로 선출된 사건은 유다를 떠올릴 때 마다 우리가 "절망이 아닌 회복과 대속,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교회가 역사 속에서 여러 배신과 분열, 타락의 흔적을 남겼음에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세우시고 다시금 공동체를 정비하여 복음의 길을 이어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이렇게 공백을 채우고 나아갔듯이,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무너지면 또 다른 일꾼이 일어나고, 어느 지역 교회가 부패하면 다른 지역 교회가 회개하며 일어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시는 교회는 어떤 위기에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확장되어 왔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장재형목사는 "유다의 배신은 교회가 반드시 경계해야 할 탐심과 배교의 상징이지만, 맛디아의 등장은 교회를 통해 계속 일하시는 하나님의 회복 사역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강조합니다. 결국 유다는 자발적 절망 가운데 목숨을 끊음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사도직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버렸고, 맛디아는 그 자리를 받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을 점검하도록 도전합니다. 나는 유다처럼 탐심이나 배교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지 않은가? 혹은 베드로처럼 실패해도 회개함으로써 다시금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새롭게 세워 사용하시는 사람들에게 기쁘게 마음을 열고 협력하고 있는가?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이 맛디아의 선출 직후에 발생합니다. 교회의 질서가 잡히자 곧이어 성령이 임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초대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합니다. 그리고 이미 회개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하루에만 삼천 명(행2:41)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더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회는 더 이상 소수 집단이 아니었고, 예루살렘 전역에 퍼져나가는 '새로운 회중', 곧 '새로운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약적 의미의 '이스라엘'은 혈통 중심이었으나,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특히 사도행전 4장에 이르면,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였으나, 이미 수많은 사람이 그들의 복음에 응답한 이후였습니다(행4:4).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4:12)라고 담대히 증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신성모독죄로 기소되던 바로 그 자리, 바로 그 문제-예수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에서 승리의 선언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때 예수님 재판에서 증언해야 할 때 침묵하고 주님을 모른다 했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자 되심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이 장면은 유다의 배신과는 반대로, 교회가 성령의 권능으로 거듭나면 결코 세상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가룟 유다의 실패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교회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고 맛디아를 통해 질서를 재정비합니다. 나아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전국적(더 나아가 세계적) 확장 국면에 돌입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실패 위에 서서 여전히 역사를 주관하시고, 회개하는 자들을 사용하시며, 새 인물도 끊임없이 부르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장의 맛디아 선출 사건이 지닌 핵심 의의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배신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사람이다 보니 잘못된 욕심을 품을 수도 있고, 순간의 실수로 형제를 넘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복음으로의 초청"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쓰러진 이들이 돌아오는 길을 열어 놓으셨고, 또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떠난 자리라면, 새로운 일꾼을 세워 그 공백을 메우십니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증거입니다. 특정 개인이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기에 교회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 나갑니다.
스데반의 사례는 유다의 실패와 정반대 길을 보여줍니다. 그는 "성전의 본질"과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열렬히 증언했습니다(행7장). 그 결과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 장면을 지켜본 사울(바울로 회심 예정)은 나중에 복음 전도의 가장 강력한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 교회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있었지만, 그것으로 교회는 무너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넓게 흩어져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행8:4). 결국 사도행전 마지막 장(28장)까지 가면, 바울이 로마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아무도 그를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행28:31)는 승리의 결론에 이릅니다.
이와 같은 복음 확장의 동력은 "배신과 실패로 인한 상처를 뛰어넘는 성령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사람이 만든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가 교회를 이끈다"고 설명합니다. 유다는 스스로 사도직을 저버린 사람이었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택하신 맛디아를 통하여 사도의 공백을 메우고 계속 전진했습니다. 이후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죄를 짓고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새로운 개혁자와 부흥운동을 일으키셔서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도록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과 2장의 연결은, 구약적 예언(요엘서 2:28-29 등)과 예수님의 약속(행1:4-5, 요14:16-17)이 실현되는 놀라운 성취 현장을 보여줍니다. 맛디아가 뽑혀 열두 사도가 온전해지고, 그들의 기도가 이어지자, 곧바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는 장면은 하나님의 계획이 치밀하고도 신실하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극적으로 그려냅니다. 교회는 이 성령 강림을 계기로 단순히 한 유대인 종파가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복음의 통로'로 급부상합니다. 인종과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복음이 선포되고, 수많은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유다와 맛디아의 대비 속에서 "교회의 거룩한 질서"와 "인간의 연약함"을 동시에 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배신할 수 있고, 심지어 절망 속에서 목숨을 끊는 선택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의 연약함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의 내주하심 안에서 계속 세워지고, 회복되고, 전진해갑니다. 이것이 "성령 시대"의 특징이자, 사도행전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고, 유다의 공백을 메워 사도의 반열을 다시 세워, 결국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형태의 '유다'가 여전히 교회 안팎에서 발생합니다. 돈, 권력, 교권, 명예 등으로 인해 스스로 자리를 내던지는 이들도 있고, 교회에 비극적 피해를 끼치는 부정과 분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맛디아'를 준비하시고, 성령으로 교회를 새롭게 일으키십니다. 교회를 움직이는 최종 동력은 "인간의 힘이나 교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배신과 회복, 반역과 순교, 나태와 부흥"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 모든 과정을 관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선포된 뒤, '열둘' 중 하나가 배신하여 빈자리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새 인물을 선택하여 사도적 공동체를 이어가게 하십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성령이 임하여 베드로가 설교하면 수천 명이 회개하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면 사울이 회심하는 거대한 선교 역사로 이어집니다. 교회는 이처럼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성장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 성장을 멈추지 않고 이어가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 한국 교회, 세계 교회를 향해 "우리가 배신과 절망에 머무르지 말고, 맛디아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자"고 호소합니다. 교회가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실망할 때마다, 사도행전 1장의 메시지를 붙들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며, 우리의 연약함보다 더 큰 힘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 계속해서 복음 전파의 길을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초점은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가?"가 아니라, "내가 성령과 함께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가?"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초반부의 이야기는 곧 교회의 '탄생사'이며, 동시에 '정체성'을 밝히는 서막입니다. 교회는 배신자를 배출했을지라도 공멸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령으로 말미암아 배가되는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그 근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이라는 확고부동한 기초가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세워진 공동체이기에, 어떠한 위험과 타락이 닥쳐도 최후에는 반드시 회복되고 승리합니다. 그리고 이 승리는 세상이 말하는 권력 장악이나 물질적 번영이 아닌,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의 확장"으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 끝까지 이르는 이 복음의 행진은, 지금까지 2천 년 넘게 계속되어 왔으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는 구약 시대부터 이어지는 배신의 상징으로 남았고, 맛디아는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허물을 넘어서는 증표로 남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도 큰 경고와 희망을 동시에 줍니다. 경고란, 아무리 교회 일꾼이라 할지라도 사탄의 시험에 무너지면 유다처럼 배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은, 아무리 큰 배신과 타락이 교회를 엄습해도, 하나님은 맛디아 같은 새 사람을 일으키셔서 구원의 역사를 멈추지 않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뒷받침은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임했던 그 성령이 지금도 교회를 운영하시고, 전 세계 곳곳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가 겪는 현실의 문제나 교회 내부의 갈등도, 결국 성령 안에서 해결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사도행전적 통찰을 바탕으로, "교회는 실패한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실패를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점을 여러 차례 역설해 왔습니다. 궁극적으로 교회는 "유다의 길이 아닌 맛디아의 길, 절망이 아닌 회복, 배신이 아닌 충성, 정죄가 아닌 복음 전파"를 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당부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주님의 핏자국이 남은 곳이며, 교회가 태어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과, "유다의 배신 뒤 맛디아를 통한 질서 회복" 이야기는 교회가 끝내 승리할 것임을 예표합니다. 인간적 계산으로 보면 배신이 교회를 망칠 것 같지만, 성령이 임하자 교회는 더 크게 부흥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며, 교회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공동체는 어떤 배신도, 어떤 고난도 결국 복음의 확장을 막지 못합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교회에서 크고 작은 위기가 찾아옵니다. 지도자의 도덕적 실패나 재정적 부패, 교권 다툼 등으로 공동체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마가의 다락방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한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때,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공백"을 치유하시고 "맛디아"를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원형적 장면으로, 지금도 우리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본받아야 할 영적 원리입니다. 예루살렘에 머무르라는 말씀, 즉 '처음 은혜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기도와 말씀 가운데 성령을 구하라'는 것은 세대를 초월하는 진리입니다.
교회는 "주님과 그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가,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며 따르고 있는가에 따라 생사가 갈립니다. 유다처럼 돈과 세속적 이해관계에만 집중하면, 교회는 한순간 무너집니다. 그러나 맛디아가 선택된 후, 사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기도할 때 오순절의 능력이 임한 것처럼, 교회는 거듭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역사가 말해주듯, 진정한 부흥은 언제나 회개와 기도로부터 시작된다"고 역설합니다. 아무리 위기가 크다 해도, 교회가 진실한 회개와 기도에 전념하면 성령이 반드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역사는 사도행전 시대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되어 증명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서 천사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3절과 연계되는 "주님의 재림"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예루살렘을 지키며 성령을 기다리는 태도"를 가지고, 또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순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사도적 사명이 무엇인가, 교회 내 봉사 직분이 무엇인가, 이를 성령 안에서 감당하려는 노력이 계속될 때, 교회는 어떤 배신과 분열도 극복하고 복음으로 더 풍성히 세워집니다.
유다와 맛디아, 이 두 인물은 "교회 안에 자리한 배신과 회복의 흔적"을 상징합니다. 이는 언제나 성령의 임재가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냄을 알려줍니다. 유다는 성령이 아닌 사탄의 유혹에 마음을 내주었고, 결국은 자살이라는 비극에 이르렀습니다. 반면, 맛디아는 공동체와 함께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다가 사도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교회 사역에 합류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극명합니다. 교회가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는 자명합니다. 오직 성령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높이며,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신뢰함으로써, 교회는 세상 권력과 재물을 초월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의 첫 장에 기록된 짧은 이야기(유다의 최후와 맛디아의 선출)는 이후 교회가 어떻게 굴곡을 헤쳐 나가는지에 대한 핵심 열쇠가 됩니다. 나아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린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으로 충만해져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듯, 오늘날 교회도 성령의 역동 속에서 세상 곳곳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교회가 그 정체성(예수 피값으로 사신 공동체)과 사명(땅 끝까지 복음 전파)을 잊지 않도록 계속 상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갈등과 시험을 마주할 때, 인간적 낙심에 빠지기보다 '맛디아의 길'을 통해 회복하시고 전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해야 합니다.
모든 초점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성령의 흐름이 땅 끝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적 파노라마입니다. 그 도중에 어떤 배신도, 어떤 절망도,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셨으니, 교회 역시 그 생명을 이어받아 어떤 형태의 죽음도 극복해낼 수 있습니다. 유다의 배신도, 스데반의 순교도, 베드로의 부인도, 사울의 박해도 모두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 앞에서 결국 회개와 구원, 회복과 선교의 놀라운 길로 뒤바뀌었습니다. 이 진리가 사도행전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이자,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배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지라도, 맛디아의 빛이 언제나 존재한다"며, 성령을 받은 교회가 일어설 수 있는 이유를 열정적으로 해설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 믿음, 기도, 성령"이고, 이 네 가지가 결합될 때 교회는 어떤 상처도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신으로 얼룩진 자리를 성령께서 빛으로 바꾸실 때, 교회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부가 되어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합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복음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난 배신과 회복의 장면들은 2천 년 교회사의 축소판이라 불릴 만합니다. 교회사는 반복적으로 배신과 타락, 회개와 부흥을 경험해 왔고, 그때마다 성령께서 역사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원형을 보여주는 본보기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명령, 그리고 유다의 배신으로 생긴 공백을 맛디아로 채우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교회의 보호자이자 주권자는 주님이시다"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유다의 길과 맛디아의 길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유다처럼 탐심과 배신의 가능성은 누구나 품을 수 있고, 맛디아처럼 하나님께 쓰임받을 기회 역시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 차이는 성령의 음성에 얼마나 순종하는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얼마나 진실하게 붙드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머무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도망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는 경고이자 권면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임할 때, 우리는 맛디아처럼 "사도의 직무"를 받으며 교회 공동체의 완전함에 기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장에 담긴 핵심 메시지이며, 교회가 세상 끝날까지 붙들어야 할 지표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행1:11),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의 길은 계속됩니다. 인간의 배신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회복이요, 죽음보다 강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며, 죄의 권세를 능가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교회는 이 진리를 붙들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하며, "맛디아를 통해 보여주신 새 기회"와 "스데반을 통해 증거하신 순교의 열정", "베드로를 통해 드러내신 회개와 담대함", "사울을 통해 베푸신 구원의 능력"을 날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하며, 세상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교회는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공동체"라는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교회가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인정하면, 어떤 배신도 절망도 교회의 정체성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성령이 그 교회를 운행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준 모습이며,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부활 신앙의 결실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를, 맛디아와 성령 강림으로 몰아내시고, 초대교회를 오히려 폭발적으로 부흥케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장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그 뒤를 이어 펼쳐지는 "성령의 파노라마"를 계속 읽어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한 사건, 한 인물의 실패나 선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구속사 속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다의 배신으로 끝이 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맛디아가 이어받아 더 큰 사명을 감당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어디서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열쇠는 '성령을 소멸하지 않고(살전5:19),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으며, 회개와 기도, 말씀과 순종으로 자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과 유다의 배신 후 맛디아가 선출된 이 사건은, 교회가 가진 '시작의 담대함'과 '회복의 능력'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교차하는 곳이며, 성령이 임한 곳이며, 교회가 탄생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서는 인간의 죄와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가 배신자를 대신해 새로운 일꾼을 세우고, 그 일꾼들과 함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이야기이며, 지금도 교회가 붙들어야 할 진리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누차 강조하듯, 교회의 진정한 힘은 건물이나 제도에 있지 않고, 바로 이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다의 길을 경계하고, 맛디아의 부름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무르라" 하신 그 뜻을 온전히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