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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종말론적 교회

1. 거룩함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성화의 과정

장재형 목사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준 '끝으로'의 권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권면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강조해 왔습니다. 바울이 3장까지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훌륭한 점들을 칭찬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담아 권면했다면, 4장에서는 신앙 공동체가 앞으로 '더욱 많이 힘쓰라'고 말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종말론적 신앙 열정이 매우 뜨거웠던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과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으나, 주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리는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종말론적 공동체에 마지막으로 꼭 덧붙여야 할 중요한 권면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곧 '거룩함(sanctification)'이며,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합니다(살전4:3).

1절에서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어떻게 행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배웠고 또 그렇게 행하고 있다고 칭찬합니다(살전4:1). 그러나 동시에 "더욱 많이 힘쓰라"라고 덧붙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아무리 훌륭하게 신앙생활을 해 왔어도, 거룩과 성화의 과정에서는 멈춤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장재형 목사 역시 여러 강설에서 "성화는 신앙의 마지막 단계까지 포기해선 안 되는 매우 중요한 과제"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첫 단추가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면, '거룩함'에 이르는 여정은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부단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향해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a)라고 분명히 천명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이나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다른 면에서 칭찬을 받아도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오늘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러 설교와 강연에서 이를 "신앙의 종국(終局)으로 가는 핵심 과제"라고 소개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6절은 "하나님이 반드시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는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으로 연결하여,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섬기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라 가르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살아갈 때 거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늘 이러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평생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살전2:4-5). 그에게 있어서 삶의 방향성과 목표는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데 있었으며, 이를 위해 그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자기 손으로 일하며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이 정신을 받아서 많은 핍박 중에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거룩함"의 문제를 더욱 분명히 짚어주고 있습니다.

특히 살전4:3-5에서 "음란을 버리라"는 구체적 명령이 등장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회라고 해도 세상적인 죄가 침투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음란(淫亂)이 매우 강력한 죄의 형태라는 것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을 통해 보여 줍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이방인 사회에서도 드문 음행이 있었습니다(고전5:1). 바울은 교회가 이런 죄를 "철저히 제하라"고 단호히 말합니다(고전5:13). 왜냐하면 음란은 교회 공동체 전체를 부패시키는 '악한 누룩'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5:6-8).

장재형 목사는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음란이나 세속적 유혹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눈, 손, 그리고 입"이라는 통로로 설명해 왔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도 인간이 죄짓게 되는 경로가 '보는 것(눈)' → '손대어 먹는 것(손, 입)'으로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오른 눈으로 범죄하면 빼어 버리고, 오른 손으로 범죄하면 찍어 버리라"(마5:29-30)고 하신 말씀은 그만큼 죄와 거룩을 놓고는 조금도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죄와 섞이고 타협하는 순간, 교회의 순수함과 생명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거룩해지는 길은 무엇인가? 바울이 로마서 5-8장에서 설명한 대로, 성령의 다스림을 힘입어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칭의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우리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은혜의 사건'이라면, 성화는 그 은혜를 받은 자가 성령과 동행함으로 죄를 이기고 거룩으로 나아가는 지속적 과정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성령을 통한 성화"의 교리입니다. 장재형 목사 역시 여러 해설과 강의에서 "로마서 6장과 7장, 그리고 8장을 반복해서 읽으라"고 권면하며, 우리 안의 옛사람을 처리하고 성령의 생명으로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길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해 왔습니다.

이렇게 거룩하게 되려면, 반대로 우리 안에서 제거해야 할 것은 바로 '음란'과 같은 죄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음란을 버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그들 역시 세상의 풍조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시사합니다(살전4:3b). 우리는 흔히 초대교회가 모두 완벽한 신앙 공동체였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죄와 갈등이 늘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끊임없이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부단히 자신을 살피며 죄를 제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은 "누룩 없는 자"가 되기 위해 이 '악한 누룩'을 없애라고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 교회도 음란을 비롯한 세속적 무질서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습니다.

레위기 전체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거룩"이라는 점(약 261번)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법전인 레위기를 통해 제사를 드렸고, 이 예배 체계의 핵심 주제가 바로 '거룩함'입니다. 모든 제사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약 시대 교회 또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 제사(롬12:1)'이며, 거룩의 추구가 핵심입니다. 하늘 예배의 장면을 요한계시록 4장에서 보더라도, 네 생물과 24장로가 모두 하나님을 향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양합니다(계4:8). 이는 신앙의 종착점이 결국 "거룩한 예배자"가 되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종말론적 열정이 뛰어났으나, 현실 세계에서 진행되는 '거룩의 훈련'을 소홀히 할 수 있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점에 특히 주목하여, 뜨거운 종말론적 신앙과 함께 "지금 이 땅 위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종말을 진심으로 소망하면서도, 현실 속에서 거룩한 윤리와 삶의 태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기형적 모습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바울은 계속해서 "거룩함"을 교우들에게 잊지 말라고, 그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목적이라고 단언합니다(살전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결코 부정하고 세속적인 일을 하게 하려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라"(살전4:7)는 바울의 고백은, 우리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선언입니다. 죄는 우리의 본성과 위배되어 고통을 주고, 결국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 자유와 평강을 주며, 나아가 다른 이들을 섬기고 짐을 질 수 있는 능력까지 부어 줍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저버리는 자는, 사람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고(살전4:8) 바울은 엄히 경고합니다.

이 모든 맥락 속에서 장재형 목사는 "성화는 결코 선택 과목이 아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걸어가야 할 필연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초대교회이건 현대교회이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이 '거룩하다' 하신 그 본성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옛 성품과 세상의 유혹을 어떻게 극복하며, 성령 안에서 성숙해 갈 것인가가 우리의 거룩의 핵심 과제입니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재림을 너무 간절히 사모한 나머지, 삶의 현장에서는 마땅히 해야 할 책임까지 소홀히 할 위험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4장 11-12절, 5장 1절 등에서 반복적으로 "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종말론이 잘못 흘러가면, '곧 하늘로 들려 올라갈 텐데 세상 일을 왜 신경 쓰냐'라는 극단적 관념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종말론은 '주님이 언제 오셔도 부끄럽지 않도록 내게 맡겨진 일과 책임을 다하는 자세'를 요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 사도는 종말론적인 긴장감과 동시에 현실적 책임감을 조화롭게 가르쳐 주었다"고 하며, 우리 역시 이 가르침을 균형있게 붙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데살로니가전서 4장 1-8절에 나타난 '끝으로'의 핵심 메시지는 거룩함이며, 이는 곧 성화의 긴 여정으로 나타납니다. 칭의를 받은 성도라면, 이제 "누룩 없는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묵은 누룩(죄악)을 제하며, 악한 습관과 세속적 관습을 떨쳐내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이 의도하신 거룩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레위기의 중심 주제가 '너희도 거룩하라, 이는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라'(레11:45 등)인 것처럼, 우리 역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침몰하지 않고 종국에 이르러 주님을 닮는 길입니다.

2. 형제 사랑과 교회 공동체의 책임

앞선 부분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거룩의 길로 나아갈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곧이어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살전4:9). 이 말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미 '형제들끼리 뜨겁게 사랑하는' 면에서 매우 훌륭하다는 뜻입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라고 칭찬까지 보태며(4:10), 데살로니가 교회가 마게도냐 지역의 다른 교회들(빌립보, 베뢰아 등)과 함께 큰 사랑을 실천해 왔음을 증거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데살로니가 교회뿐만 아니라 빌립보와 베뢰아 교회 역시 '핍박이 많고 물질적 궁핍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형제 사랑을 실천했다는 점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마게도냐 교회들이 "힘에 진하도록 자원하여" 연보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고후8:1-5). 그들은 가난해도 자기를 비우고, 다른 이들을 풍성하게 하는 사랑을 실제로 보여주었습니다. 이 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진정한 교회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형제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비단 초대교회뿐 아니라, 현대교회도 '거룩함'과 '형제 사랑'이 함께 가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거룩함을 강조하지만 사랑이 식어 있고, 또 다른 교회는 형제 사랑을 크게 주장하지만 도덕적·영적 기준이 허물어져 죄와 타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여주는 이상은 '거룩함과 형제 사랑'을 함께 이루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종말론적 열정으로 신앙생활에 매진하면서도, "형제 사랑에 관해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을 정도"라는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원리를 현대교회가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며, "우리 교회가 언제나 외부적으로 박해가 없고 비교적 안정된 환경 속에 있을 때조차 형제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이미 교회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어느 때든 서로를 돌아보고, 형제의 짐을 함께 지는 교회라면,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고 견고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4:11)고 당부합니다. 이는 종말을 소망하는 나머지, 현실적 경제 활동이나 일상의 책임을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생길 수 있음을 인식한 권면입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후서 3장에서도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의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동시에 내가 내 삶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논리는, 교회가 종말을 바라보며 뜨겁게 모여드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라"고 하여, 세상 사람들도 교회의 모습에서 덕을 보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세상을 멸시하거나 도피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에서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며" 하나님의 뜻과 왕국(kingdom)의 가치를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권면입니다. 이렇게 하면 믿지 않는 이들에게조차 교회가 흠 없이 존경받고, 교회 내부에서도 서로 의존하지 않으며 스스로 서서 이웃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교회 공동체가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동시에 사랑과 책임을 갖추어야 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종말론에 몰두할수록 교회는 지나치게 세상을 외면하거나 노동·재정·가정 같은 기본 윤리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더욱 그렇게 행하라"(살전4:10), "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4:11)라고 균형 잡힌 태도를 제시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만큼, 현실의 삶의 터전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건전하고 아름다운 표증(表證)'이 됩니다.

아울러, 데살로니가 교회는 "형제 사랑"에 이미 뛰어났으므로 바울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더욱 그렇게 행하라"(살전4:10)고 말합니다. 사랑에도 끝이 없고, 거룩함에도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더욱' 자라나고, '더욱' 힘쓰고, '더욱' 뜨거워져야 합니다.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거나, 이미 충분하다고 여기는 태도는 영적 성장을 막기 때문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온 이들이 함께 모일 때, 교회는 자칫 언어·문화·신분 등의 장벽으로 인해 분열할 수도 있고, 편견과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형제 사랑에 관하여 가르칠 것이 없을 정도로" 서로를 섬기는 태도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유대인과 이방인 교우들 사이에 많은 차별과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 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인해 "한 몸"을 이루어 나갔던 것처럼, 현대 교회에서도 사랑으로 모든 장벽을 넘는 일이 절실합니다.

바울이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살전4:10)라고 말한 것처럼, 사랑의 실천에는 늘 '더욱'이 붙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을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초대교회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이 오히려 가난했음에도 넘치는 연보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고후8:9)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부유하신 이로서 자기를 가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듯이, 우리도 가진 것을 비워서 다른 이들을 돕는 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형제 사랑이며, 교회 공동체의 책임이 됩니다.

여기서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은 단순한 감정이나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행위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지 수많은 예가 있으며, 초대교회 공동체가 가진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내 것"을 따로 주장하지 않고 재산과 물건을 서로 통용한 것(행2:44-45)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자신들의 물질이 풍족하지 않아도, 예루살렘 형제들을 돕고, 바울과 그의 일행을 후원하며, 심지어 주의 일을 위해 박해를 감수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한국 교회가 초기 성장기부터 이런 "자기를 비우는 사랑"으로 크게 부흥했다고 평가합니다. 우리나라도 힘든 시절이 길었으나, 선교사와 주변 교회들의 도움을 받았고, 동시에 스스로 서로를 도우며 형제애를 나누는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그러나 교세가 커지고 사회적·경제적 안정이 이루어지자, 오히려 형제애가 식어 가는 위험에 처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받은 형제 사랑을 현대 교회도 계속해서 본받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이처럼 형제 사랑이 충만하면서도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라"고 권면합니다(살전4:12). 교회 안에서는 뜨겁게 사랑하지만, 교회 밖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무례하거나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3:15)고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교회가 세상을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 앞에서 덕스럽고 존경받을 만한 태도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 바깥 사람들에게도 거룩함과 사랑이 흘러나가야, 그들이 오히려 복음에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형제 사랑도 "더욱더" 해야 할 숙제이며, 이는 종말론적 시각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재림을 진정으로 소망할수록, 지금 내게 주어진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어떻게 봉사하고 희생할지를 고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는 바울의 말처럼, 무책임하게 종말을 내세우기만 하며 실제 삶의 짐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를 비우고 헌신하되, 동시에 내가 해야 할 의무와 역할까지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는 성숙함에서 드러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바른 종말론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다 버려라'가 아니라,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 앞에서 더욱 성실하게, 더욱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라고 자주 설명합니다. 실제 데살로니가 교회는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자기 일을 조용히" 하면서 형제 사랑을 행하는 바람직한 태도를 보여 주었기에, 바울이 그들을 크게 칭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교회를 향해 "더욱 그렇게 행하라"고 한 이유는, 성화와 사랑에 정해진 한계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동일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거룩함에 이르라"는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고(살전4:3), "형제를 더 뜨겁게 사랑하라"는 명령도 유효합니다. 이 두 가르침을 결코 분리하거나 대립시키지 않고 함께 붙드는 것이, 초대교회가 가진 큰 영광이며 현대교회가 회복해야 할 영적 유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죄를 과감히 버리고(음란, 세속주의, 교만, 시기 등), 내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며, 동시에 교회 안팎의 이웃들에게 실제적인 사랑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그것이 곧 종말을 앞둔 교회의 빛나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해 온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핵심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신앙적 궁극 목표가 '거룩함'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며, 둘째는 "형제 사랑을 더욱 풍성히 함으로써 세상 앞에서 단정히 행하라"는 권면입니다. 교회가 종말론적 기대를 품고 살수록, '거룩함'을 지켜내면서도 현실 책임을 게을리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돕는 일에 있어서는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종말론적 시각과 현세의 삶이 균형을 이루는 건강한 교회의 지향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핍박 속에서도 종말론적 열정을 잃지 않았고, 동시에 형제 사랑과 교회의 윤리를 충분히 실천해 냈던 본보기입니다. 바울이 "더욱 그렇게 행하라"며 격려와 권면을 동시에 보냈던 이유는, 신앙에 있어서 절대 '종착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거룩과 성화의 과정에 진지하게 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형제 사랑을 더 크게 실천하며, 우리가 몸담은 가정·교회·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다.

특히, 장재형 목사가 제시한 선교적 비전과 공동체적 삶의 예시(예: All Nations Center) 등을 통해, 우리 교회가 국내외로 사랑의 실천을 확장할 수 있음을 봅니다. 이처럼 교회가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고, 생길 수 있는 갈등이나 문화 차이를 '거룩함'과 '형제애'로 극복해 나가는 것이 곧 복음의 핵심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더 나아가 전 세계 여러 지역(베세토, 유럽, 아프리카 등)에서 모여드는 형제·자매들을 기쁘게 맞이하며 영적으로 양육하고, 우리가 받은 은혜를 힘껏 나누는 일은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는 구체적인 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 '끝으로' 당부해야 할 말을 다시금 정리하면, 결국 바울이 전하는 한 문장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그리고 동시에 "너희가 서로 사랑함에 대해 나는 더 쓸 것이 없다. 그러나 더욱 그렇게 하라"(4:9-10). 거룩함과 형제 사랑은 별개가 아니라 한 몸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쪽이 결여되면 교회는 분명히 병들게 됩니다. 오직 이 둘을 함께 붙들 때, 우리의 신앙은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으며, 마침내 종말의 날에 주님 앞에서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끝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향한 성화의 과정을 멈추지 않고, 형제 사랑에 있어서는 날마다 더욱더 풍성해져야 한다"는 점을 누차 강조합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권면은 데살로니가교회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끊임없이 자라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