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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갈라디아서로 돌아가는 순수한 복음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문화와 트렌드 속에서 복음이 소비재로 전락하지 않도록, 신앙의 뿌리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본질적인 질문으로 돌려세웁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 했는가, 성탄의 의미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그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성탄의 가장 명료한 해설로 제시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의 선물로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을 삶의 차원에서 풀어냅니다. 이때 강조점은 교리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삶의 변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로 우리를 멸망에서 건져 영생의 방향으로 옮기는 힘이라는 사실을 붙들 때, 성탄은 연말의 휴일이나 감상적 이벤트가 아니라 구원의 드라마가 시작된 현실이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진리를 개인의 위로에 한정하지 않고,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와 사명의 기준으로 확장합니다. 교회가 세상 앞에서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언제나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복음, 오직 복음, 그리고 그 복음이 만들어 내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그가 복음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해명하는 데 가장 신뢰하는 창구는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는 죄와 의, 율법과 은혜, 심판과 구원, 그리고 성령 안의 자유까지 복음의 지형도를 가장 치밀하게 그려낸 책으로,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1장, 5장, 8장을 통해 "왜 오직 예수인가"라는 질문의 최종 해답을 분명히 합니다. 로마서 5장의 새 아담론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와 사망 아래 들어갔으나,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통치, 곧 은혜와 생명의 질서가 열렸음을 선언합니다. 로마서 8장은 정죄함이 끝나고 성령의 생명 법이 시작되는 지점을 선명하게 가리키며,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과거 샌프란시스코에서 로마서 강해를 이어가며 성탄절을 맞았을 때, 바로 이 8장의 메시지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오신 주님"을 선포했습니다. 그 설교의 초점은 단순한 교리적 표제어가 아니라, 죄 아래 신음하던 우리가 어떻게 은혜의 통치로 이전되는지에 대한 구체적 증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성탄은 죄인인 우리에게 주어진 출구"라는 고백으로 삶을 다시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아는 것"만큼이나 "지키는 것"을 중대하게 여깁니다. 이 지점에서 갈라디아서는 장재형목사가 거듭 불러오는 경계의 나팔입니다. 초대교회 안으로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이 복음에 할례를 덧붙이려 했던 사건은, 복음이 타협될 때 생명력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경고였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21세기의 교회 현실에 정직하게 대입합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복음+무언가"를 덧붙이려는 시도는 여전히 반복됩니다. 전통일 수도, 의식일 수도, 성과주의적 기준이나 시대의 인기를 얻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것이어도 복음의 충분성 위에 더해지는 순간 복음은 흐려지고 결국 힘을 잃습니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 1장 8절의 준엄한 선고를 상기시킵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전한 복음 외의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는 교회의 정체성을 개혁교회, 곧 "Re-formed-다시 빚어진 공동체"로 규정합니다. 여기서 개혁은 전통의 보존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로의 귀환을 의미합니다. 교회사는 두 축, 곧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기독론과 어떻게 구원받는가라는 구원론의 긴장으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 구원론의 왜곡, 곧 복음의 순수함 위에 행위와 규례, 인간의 권위가 포개지며 진리가 흐려진 상황에 대한 신앙의 각성이었습니다. 이사야가 "포도주에 물이 타고 은에 찌끼가 끼었다"고 탄식했듯, 복음은 언제든지 인간적 덧칠로 탁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의 구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는 과거의 표어가 아니라 오늘의 생존 규칙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바울의 순수한 구원론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자고 촉구합니다. 이 되돌아감이야말로 진정한 전진이며, 교회의 갱신은 언제나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 복음 수호의 관점은 선교 현장에서도 뚜렷합니다. 최근 장재형목사가 라틴 아메리카로 사역의 지평을 확장하면서, 그는 그 지역의 긴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되 구원의 충분성에 관한 복음적 원칙을 분명히 밝힙니다. 특정 전통과 의식이 신앙의 풍성함을 돕는 한에서 존중받을 수 있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처럼 기능하기 시작할 때 복음은 희미해집니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가 구원의 전부라는 사실이 선명히 선포될 때, 사람들은 행위와 관습으로 짜여 있던 무거운 멍에에서 풀려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경험합니다. 라틴 지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장식이 아니라 복음의 중심을 되찾는 일이며, 바로 그때 사랑과 거룩과 기쁨의 열매가 도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선교가 문화적 접변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각 문화의 언어로 정확히 번역하는 일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장재형목사의 복음 이해에서 핵심은 "충분성"과 "독점성"의 균형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구원에 충분하며 동시에 대체 불가능합니다. 다른 어떤 매개나 성취도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그는 이 원리를 교회 운영과 제자훈련, 목회 리더십의 기준으로도 삼습니다. 교회의 프로그램과 전략은 복음을 전달하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며, 수단이 목적을 덮어 버릴 때 교회는 속도를 내지만 방향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충분성과 독점성을 지키는 일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매우 실천적인 지침입니다. 설교의 방향이 결정되고, 예배의 중심이 바로 서며, 봉사와 선교의 우선순위가 재배치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인들의 삶이 달라집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하며, 은혜를 값없이 받았기에 값없이 흘려보내는 존재로 재구성됩니다.

그는 또한 복음을 변증할 준비에 대해 베드로전서 3장 15절을 즐겨 상기시킵니다.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하되, 그 대답이 성경적 논리와 삶의 증언이라는 두 다리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로마서의 신학은 단단한 골격이 되고, 갈라디아서의 경계는 신경계처럼 오류를 감지해 즉시 수정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성경 공부와 제자훈련의 목표를 "지식의 확보"가 아니라 "논리와 삶의 일치"로 둡니다. 진리를 체계로만 아는 사람은 쉽게 논쟁가가 되지만, 진리를 삶으로 아는 사람은 증인으로 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교육을 설교-소그룹-현장 실천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로 제시하며, 말씀을 배운 그 주간에 반드시 누군가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행동으로 나아가자고 독려합니다.

복음이 희미해졌을 때 교회는 왜 힘을 잃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단호합니다. "말씀의 칼이 무디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스데반이 구약과 이스라엘 역사를 꿰뚫는 통전적 이해를 바탕으로 최후까지 담대히 증언했듯, 오늘의 성도도 성경의 큰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배워야 합니다.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복음의 내러티브를 몸으로 외울 때, 우리는 일상의 수많은 장면에서 복음의 창을 열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화해, 직장에서의 정직, 사회적 약자를 향한 긍휼은 성경의 주제를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며, 이 실천이 있을 때 교회는 다시 소금과 빛이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지식은 뜨거운 사랑으로 증명되고, 사랑은 바른 진리로 정화된다"고 말하며, 진리와 사랑의 두 날개로 나는 교회상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조직과 제도의 문제에도 분명한 기준을 줍니다. 교회의 권위는 사람이 만든 체계나 지위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온 복음의 권위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나 형식주의로 흐르며 사람의 권위를 강화하는 구조는 아무리 숫자와 활동이 늘어도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반대로 순수한 복음을 고백하고, 그 고백 위에 질서와 사랑을 세우는 개혁교회는 작아도 강합니다. 연약해 보이지만 생명이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전 세계 교회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을 경험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핵심은 복음의 본질을 붙드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시대, 어떤 권력, 어떤 위기 앞에서도 교회가 포기하지 않을 최후의 보루입니다.

성탄을 다시 생각할 때 그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새 아담이신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지 되짚어 보자고 권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갈라디아서의 고백이 구호가 아니라 실제가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의와 자기 연민 사이를 흔들리는 존재가 아니라 은혜의 통치 아래 서 있는 자가 됩니다. 이 변화는 감정의 일시적 고조가 아니라, 정체성의 근본적 재편입니다. 죄의 기억은 남아도 정죄는 끝났고, 자기연민은 사라지며 감사가 자랍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베드로전서의 권면처럼 담대히 대답할 준비를 갖춥니다. 나의 소망은 나에게서 나오지 않고, 나를 위해 오신 그분에게서 나온다고. 그래서 성탄은 나의 이야기이고, 복음은 나의 현재형이라고.

장재형목사의 설교와 강의, 그리고 현장 사역이 한 방향으로 수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복음주의(Evangelical)"를 특정 교파나 문화 코드가 아니라 "복음의 충분성과 우월성에 생명을 거는 신앙고백"으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복음주의 센터(Evangelical Center)는 행사장의 이름이 아니라 사명의 거점입니다. 말씀 교육과 제자 양육, 지역 복음화가 한 몸처럼 연결되어, 한 영혼이 구원받아 교회로 세워지고 다음 세대를 낳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 흐름이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 아시아 곳곳에서 동시에 일어날 때,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가 한 복음 안에서 교제를 나누며 세계선교의 새로운 장을 엽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그 장을 위해, 한 사람의 변화에서 한 도시의 변화로, 한 교회의 갱신에서 한 지역의 각성으로 복음의 파동이 번져 가는 그림을 제시합니다.

결국 관건은 고백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건물의 규모나 프로그램의 화려함이 아니라, 어떤 고백 위에 서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도 동일하게 권합니다. 로마서로 복음의 논리를 배우고, 갈라디아서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며, 요한복음 3장 16절로 성탄의 이유를 삶으로 증명하자고. 그리고 그 고백을 가정과 일터와 이웃에게로, 지역과 민족과 열방에게로 흘려보내자고. 그렇게 할 때 교회는 지치지 않습니다. 복음의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고, 성령의 열매가 가득한 공동체가 세워집니다.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단순하지만 거룩합니다. 순수한 복음을 붙들라,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살라, 그리고 그 복음으로 세상을 밝히라. 이것이 성탄이 다시 복음이 되는 길이며, 교회가 다시 교회가 되는 길이며, 우리의 삶이 참 소망의 이야기로 다시 쓰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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