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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의 길: 장재형 목사의 고린도후서 5장

장재형(장다윗)목사의 고린도후서 5장 강해는 바울이 4장 16절에서 밝힌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고백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아, 인간 실존의 균열과 복음의 치유를 동시에 보여 준다. 그는 겉사람과 속사람을 거칠게 이분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쇠약해지는 육체와, 영원의 빛 속에서 새로워지는 내면이 한 사람 안에서 긴장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성경의 언어로 설명한다. 그 설명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오늘의 피곤과 상실, 불안과 소망을 통과하는 우리 일상의 문장들로 번역된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라는 핵심키워드는 단지 설교자의 이름이 아니라, 고린도후서 5장의 메시지를 현대인의 삶에 접속시키는 해석의 방식과 목회적 감수성을 가리키는 이름이 된다.

그는 먼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라는 바울의 은유를 통해, 인간의 육신과 이 땅의 삶이 본질적으로 임시성 속에 놓여 있음을 상기시킨다. 장막은 견고한 석조물이 아니라 떠나기 위해 친 거처다. 그래서 장막의 임시성은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방향의 물음이 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장재형 목사는 이 물음을 '본향'에 대한 사모로 이끈다.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현재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영원의 좌표를 잃지 않는다. 이 땅은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성경의 자각은, 현실을 저평가하는 값싼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더 진지하게 살게 하는 동력이 된다. 왜냐하면 본향을 향한 여행자는 하루하루를 목적지와 연결된 시간으로 살기 때문이다.

장막집이 무너지는 사건, 곧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성도에게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귀향이며, 닫힘이 아니라 열림이다.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의 영원한 집이 준비되어 있다는 약속은 인간의 공로나 능력으로 확보한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약속이 가져다주는 담대함을 강조하면서도, 그 담대함이 현실을 가볍게 만들지 않도록 최후의 심판에 대한 경외를 함께 놓는다. 소망과 경외가 균형을 이룰 때,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도덕적 무게 중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는 성도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아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도록, 자기 양심 앞에서 스스로를 책망하고 권면하도록 부른받았음을 환기한다. 이 경외는 불안의 족쇄가 아니라 성숙의 호흡이다.

하늘의 처소를 "덧입는다"는 표현은 장재형 목사의 강해에서 부활 신앙의 핵심으로 풀린다. 벗는 것만이 아니라 덧입는 것, 곧 낡은 몸을 버리고 신령한 몸을 입는 사건이 신자의 미래다. 여기서 몸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변모의 대상이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 인간은 벌거벗은 공허가 아니라 신령한 충만 속으로 옮겨간다. 이런 해석은 "영혼만 구원받고 몸은 무가치하다"는 오해를 단호히 거부한다. 하나님은 전인(全人)을 창조하셨고, 구원도 전인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은 내세의 달콤한 상상으로 현재를 지우는 수면제가 아니라, 오늘의 선택을 새롭게 정렬시키는 현실의 힘이다. 언젠가 완전히 입게 될 새 옷을 믿음으로 미리 입고 살아가는 태도, 이것이 거룩의 실천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선언은 장재형 목사에게서 삶의 기술로 번역된다. 믿음은 장차 도래할 실재를 현재로 당겨오는 능력이다. 그래서 그는 고난이 오히려 영광을 선명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미래의 부활과 하늘의 집이 현재의 결핍과 통증을 삼켜, 두려움의 무게중심을 옮겨 놓는다. 그렇다고 현실 회피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목표가 한 가지로 모아진다.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 이 단순한 목표는 우리의 시간과 재정, 관계와 언어의 습관을 재배열한다. 복잡한 선택지 앞에서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흔들릴 때, "무엇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가"라는 질문은 가장 분명한 나침반이 된다.

이 삶의 심장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는 복음이 뛴다. 강권은 강압이 아니라 압도다. 그 사랑의 무게가 방향을 정하고 속도를 조절하며, 머뭇거림을 밀어낸다.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으셨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바울의 진술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연방적 대표성이라는 복음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왕 노릇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대속의 죽음으로 생명이 통치한다. 이 구조를 깊이 깨달은 사람은 다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없다. 나를 대신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해 사는 삶,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대전환이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전환이 신자의 정체성과 사명을 동시에 낳는다고 강조한다.

그 결과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위대한 선언이 현실이 된다. 새로운 피조물은 개선된 버전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기원의 존재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죄책과 수치, 왜곡된 자기상과 관계의 패턴이 효력을 잃는다. 정체성이 사명을 낳는다. 내가 누구인지가 내가 무엇을 하는지를 규정한다. 새로운 피조물은 사람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 외모와 스펙, 세상의 평판이 판단의 잣대였던 과거는 힘을 잃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조차도 한때 육신을 따라 오해했을지 모르나, 이제는 부활하신 영광의 주로 안다. 이 새 시선은 내면의 자유를 낳고, 관계의 질서를 새롭게 하며, 일터의 윤리를 바꿔 놓는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신자의 변화가 사적 공간에 갇히지 않고 공적 영역으로 번져야 한다고 말한다. 천국 시민권의 문화가 작은 것부터 현실 속에 구현될 때, 세상은 복음을 눈으로 보게 된다.

새 사람에게 맡겨진 사명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그 화목의 복음을 들고 세상 속으로 파송된다. 대사는 자기 말을 하지 않는다. 보낸 이의 뜻을 정확히 전하고, 보낸 이의 품격을 몸으로 보여 준다. 그래서 화목은 감정의 화해에 머물지 않는다. 공의와 진실을 반드시 동반한다. 죄를 덮어주는 척하며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되 사랑으로 말한다. 이 길에서 신자는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로 선다. 분열과 갈등으로 균열 난 공동체 속에서, 화목의 직책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증명된다. 용서를 선택하고, 상처를 다루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며, 평화를 만드는 일에 비용을 지불한다. 화목은 선언이 아니라 공사 현장이다.

화목의 최종적 근거는 "하나님의 의"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사건에서, 구원의 대교환이 일어났다. 그는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우리는 그의 의를 입는다. 이 의는 바깥에서 입혀지는 의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다. 동시에 담대함을 잃을 이유도 없다. 우리는 실패한 날에도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고, 성공한 날에도 공로를 내세우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를 입은 사람은 낮아지되 비굴하지 않고, 높아지되 교만하지 않다. 장재형목사는 이 교리가 일상의 호흡과 습관으로 스며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도와 말씀 묵상, 성찬과 공동체의 교제가 반복될 때 믿음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품이 된다. 시간과 재정, 언어와 관계가 복음의 질서로 재배열되면 삶은 단순해진다. 이 단순함은 빈곤이 아니라 풍요다. 덜어 낼수록 하늘의 것이 채워진다.

고난의 자리는 이 모든 진리가 가장 맑게 들리는 장소다. 상실을 겪는 이들에게 부활의 소망은 싸구려 위로가 아니라 깊이 내려가는 닻이 된다. 임종의 순간, 장막집이 무너질 때 하늘의 영원한 집이 기다린다는 약속은 눈물 속에 스며드는 빛이 된다. 애도의 시간에도 교회는 서로를 돌보며, 남겨진 자들이 화목의 직책을 이어 가도록 격려한다. 공적 영역에서도 신자는 정직과 정의, 자비와 책임으로 천국 시민권의 문화를 미리 살아낸다. 작은 약속을 지키고, 약자를 보호하며,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평범한 실천이 하늘 나라의 언어다. 믿음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형태를 입는다.

종말론적 시선은 현재의 윤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마지막 날의 상급에 대한 소망은 선한 수고를 가볍게 만들지 않고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보상은 사람의 박수보다 무겁다. 동시에 심판에 대한 경고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도록 경계선을 그어 준다. 사랑과 두려움의 균형이 깨지면, 신앙은 과격하거나 무력해진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힘을 갖는 이유는 이 미묘한 균형을 끝까지 지켜 내기 때문이다. 그는 좁은 길을 말하지만, 바로 그 좁음이 생명을 낳는 길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그래서 이 강해는 위축된 양심을 일으켜 세우고, 흔들리는 마음을 목적지로 다시 돌린다.

결국 고린도후서 5장은 신자의 정체성과 사명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대사다. 이 정체성과 사명은 겉사람의 낡아짐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속사람의 새로워짐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장막집이 무너질 날을 담담히 준비하면서도 하늘의 집을 사모하는 소망으로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게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는 바를 따라,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해 산다. 이것이 장재형목사의 고린도후서 5장 강해가 오늘의 독자에게 들려주는 가장 근원적인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소망으로 오늘의 목적을 재정립하고, 성경 해석의 깊이를 삶의 현장에 스며들게 하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다시 중심으로 세운다. 그래서 이 메시지는 낡지 않는다. 날마다 새롭게 우리를 새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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