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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로마서 12장으로 본 그리스도인의 덕목과 대사회적 윤리

로마서 12장 9-21절을 따라 그리스도인의 일상과 공적 책임을 다시 세밀하게 짚어 갈 때, 우리는 신앙의 중심이 의외로 아주 구체적인 관계의 태도와 생활 습관 속에 놓여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본문을 사랑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귀결되는 단단한 윤리의 아치로 읽어내며, 교회 안에서는 형제애와 섬김이 숨 쉬어야 하고, 교회 밖에서는 축복과 화해가 우리의 첫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선언은 단지 도덕적 수사를 넘어, 교회 공동체의 영적 체온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칭찬과 호의의 말이 오가는 자리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계산적인 친절로 서로를 대할 수 있고, 무관심을 예의로 포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풀어내는 사랑은, 자기 유익과 이미지를 내려놓고 상대의 선을 위해 움직이는 아가페의 결단이다. 그 결단은 곧 악에 대한 분별로 이어진다. 악을 미워한다는 말은 사람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죄의 구조는 단호히 거부하되 사람에게는 여지를 남기는 태도, 곧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긴장 속에서만 가능한 윤리다. 그 긴장을 잃지 않기 위해 신자는 '선의 편'에 서기로 매일 책임 있게 선택해야 한다. 선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서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고 상처를 감싸는 구체적 행동의 이름이다.

형제를 서로 우애로 대한다는 것은 현대의 고립과 피로의 시대에 유난히 현실적인 요구다. 각자도생의 리듬 속에서 우리는 쉽게 서로를 프로젝트로, 네트워크로, 혹은 취향의 군집으로 대체한다. 하지만 교회는 친밀함을 욕망의 소비가 아니라, 성육신적 환대의 실행으로 배워야 한다. 우애는 마주 앉아 식탁을 나누는 시간, 상대의 이야기를 독점하지 않고 귀 기울이는 청취, 불편을 감수하는 정중함에서 자란다. 존경을 서로 먼저 하라는 권면은 그래서 공동체의 숨은 질서를 바꾼다. 힘센 자가 앞서고 말 잘하는 자가 주도하는 모임이 아니라, 약한 자와 조용한 자가 안전하게 발언할 수 있도록 여백을 비워 두는 모임.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타자를 앞세우는 공간 만들기의 기술이며, 장재형목사는 이 겸손이야말로 초대교회의 생명력을 오늘에 소환하는 관문이라고 지적한다.

부지런함은 신령주의와 무관심의 사이에 길을 낸다. 게으름은 언제나 사소한 변명으로 시작하지만, 공동체의 열매를 갉아먹는 결과로 끝난다. 그러나 성경적 부지런함은 과로의 미덕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것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방향 설정, 곧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시간을 쓰는가라는 목적의식에서 비롯된다. 어떤 사본상의 혼동을 둘러싼 주해처럼 '주님(퀴리오스)'과 '때(카이로스)'는 결국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주를 섬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때를 민감하게 붙드는 일, 하필 지금 여기에서 순종해야 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일이다. 우리 시대의 카이로스는 종종 작은 메시지 알림으로 온다. 도움을 요청하는 카톡 한 줄, "괜찮아?"라고 물을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타이밍, 퇴근길에 들를 수 있었던 병원과 장례식장, 눈길을 나눌 수 있었던 식탁. 부지런함과 열심은 이런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 주의 깊음에서 시작한다.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는 말은 현실 회피의 미소가 아니다. 그 뿌리는 영화롭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곧 시간의 방향이 하나님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확신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환난 중에도 인내한다. 인내는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폭풍을 통과해 더 깊은 사람으로 빚어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유지하는 호흡이 기도다. "기도에 항상 힘쓰라"는 말은 내 뜻을 관철하는 주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동조시키는 훈련에 가깝다. 기도는 공동체의 영적 순환계와 같아서, 기도가 끊기면 봉사도, 교제도, 선교도 이내 숨이 가빠진다. 장재형목사는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공동체의 걸음을 재정렬하신다고 말하며, 캠퍼스 선교, 구제, 교육, 미디어 사역 등 다양한 은사가 기도 속에서 서로의 리듬을 맞출 때 비로소 아름다운 합주가 된다고 해석한다.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는 일은 연민의 감정으로 충분하지 않다. 경제적 위기, 질병, 돌봄의 공백 앞에서 교회는 '가능한 선'이 아니라 '필요한 선'을 선택해야 한다. 가능과 필요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헌금과 자원봉사, 직업적 전문성의 나눔이다. 법률, 의료, 상담, 코칭, 금융 교육 등 각자의 재능이 '성도의 쓸 것'이 되는 구체는 놀라울 만큼 다양하다. 나그네 대접의 전통도 오늘에 이어져야 한다. 도시의 밤은 외롭고, 청년의 자취방은 종종 단칸의 침묵으로 가득하다. 주일 점심 한 끼의 환대, 방학 동안 기숙사의 빈방을 제공하는 작은 배려, 타지 유학생에게 고향 같은 교회를 선물하는 상상력은 복음의 온기를 현실로 바꾼다. 환대는 예배당 문턱을 낮추고, 타 문화권의 낯섦을 포용하며, 소수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제 시선을 교회 밖으로 돌리면, 윤리는 더욱 역동적이고 도전적으로 변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는 명령은 정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혐오가 빠르게 확산되는 온라인 공간에서, 악플에 선플로, 조롱에 침묵과 기도로, 왜곡에 사실 확인과 온유한 설명으로 응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축복은 그리스도인의 첫 본능이 되어야 한다. 축복은 상대의 악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중단시키려는 의지의 언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권면은 공감의 윤리를 외연으로 확장한다. 나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이웃의 기쁨에도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관용, 타 종교·무신론자·성소수자·이민자·장애인의 슬픔에도 눈물을 보탤 수 있는 인간적 진심이 곧 복음의 길을 연다. 공감은 신앙적 양보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 마음의 반사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는 말은 동조의 압박이 아니라, 선한 목적을 향해 의견 차를 조율하는 지혜를 뜻한다. 평화를 사랑하지만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균형, 대화의 문을 닫지 않되 기준선을 흐리지 않는 균형이 필요하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처하라"는 권면은 그 균형의 체중을 언제나 약자 쪽으로 옮기게 한다. 교회의 언어가 권력의 언어로 변질되면 복음은 힘을 잃는다. 사회적 약자, 세대 간 격차, 성별·지역·학력의 장벽 앞에서 교회는 먼저 낮은 자리를 자원해야 한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는 경고 또한 중요하다. 정보의 홍수 속에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용기, 듣는 시간을 길게 가져가는 겸손은 진실의 우군이다. 교회가 전문가를 존중하고, 팩트를 확인하며, 회개할 줄 아는 공동체일 때만 세상은 우리의 진심을 신뢰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구절은 공적 윤리의 핵심 요약이다. 합법을 넘어 정직으로, 관행을 넘어 투명으로, 편가름을 넘어 공정을 택하는 습관은 개인의 덕목이자 교회의 체질이다. 연구윤리,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캠퍼스의 표절 문제, 데이터와 개인정보의 보호, 창작물의 저작권 준수 등 현대의 세부적 윤리는 복잡하고 전문적이지만,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원칙은 놀라울 만큼 선명하다. 선을 도모한다는 것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까지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신자는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추구한다. 이 문장의 유보어는 현실 감각의 표현이다. 모든 갈등이 타협으로 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화해의 여지를 먼저 탐색하고, 법적 대응이 불가피할지라도 적대를 최소화하며, 가능하다면 제3자의 중재를 수용하는 태도, 대화를 한 번 더 시도하는 끈기는 그 자체로 복음의 표지다.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권면은 정의의 포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의의 심판자가 하나님이심을 신뢰함으로써, 개인적 복수의 충동을 절제하라는 기초 규범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법과 제도를 존중하고, 공적 절차 속에서 사회적 정의를 추구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명령은 놀라운 실천으로 이어진다. 기업의 내부고발자와 그 조직, 정파가 다른 동료, 교회를 적대하던 이웃과의 관계에서 '선제적 호의'를 실험하는 공동체만이 화해의 선순환을 시작할 수 있다. 원수의 머리에 쌓이는 '숯불'은 부끄러움과 성찰의 열기다. 선의 집요함은 때로 가장 완고한 마음을 녹인다. 그러나 상대가 끝내 회개하지 않더라도, 선을 선택한 쪽이 패배한 것은 아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결론이 우리 편에 힘을 남긴다. 악의 방식으로 싸우면 이미 악에게 진 것이다. 선은 느려 보이지만 결국 악을 소진시킨다. 십자가는 그 역설의 역사적 사례다.

이 모든 덕목과 윤리는 교회 안과 밖을 가르는 담장 위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주일의 예배와 월요일의 직무, 공동체의 식탁과 사회의 공론장, 개인의 양심과 제도의 절차에서 하나의 인격이 일관되게 드러나야 한다. 학생이라면 과제와 팀플에서의 정직과 배려, 실험실과 스튜디오에서의 안전과 공정, 동아리와 자취방에서의 청결과 책임이 곧 신앙고백의 문법이 된다. 직장인에게는 보고서의 투명함, 회의의 경청, 퇴사자의 평판을 지켜 주는 말의 품격, 외주업체와 인턴에게 공정하게 대하는 계약의 양심이 그 문법이다. 가정에서는 돌봄의 분담, 노부모와 자녀를 향한 일관된 온정, 갈등을 해결하는 말의 온도와 속도가 동일한 문법으로 기능한다. 어느 문맥에서든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대서사가 사소한 생활 문장들 안에서 문법적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구체적 적용의 예를 더하자. '거짓 없는 사랑'을 공부습관에 옮기면 표절의 유혹을 이기는 근면과 출처 표기에 대한 세심함이 된다. '우애와 존경'은 팀 프로젝트에서 말이 느린 동료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고, 리더가 아닌 이의 제안을 문서에 반영하는 투명함으로 드러난다. '부지런함과 열심'은 마감 직전의 폭주가 아니라, 아침의 루틴과 주간 계획의 성실함으로 측정된다. '주를 섬김'은 과외와 아르바이트에서 약속한 시간을 지키고, 수고에 합당한 대가를 정직하게 요구하고 지불하는 생활 윤리로 확장된다. '소망 중에 즐거움'은 취업 실패와 연애의 좌절 속에서 자기 연민 대신 자기 성찰과 친구 응원의 문자를 선택하는 작은 회복탄력성이다. '환난 중 인내'는 논문이 반려되어도 데이터와 방법론을 다시 다듬어 재도전하는 끈기다. '기도에 힘씀'은 일정표에 10분의 침묵과 3줄의 감사 일기를 고정하는 습관이 된다. '성도들의 쓸 것 공급'은 장학모금과 밥 한 끼의 나눔, 생리대·패드·담요 같은 생활필수품을 후배의 필요에 맞춰 전해 주는 섬세함이다. '손 대접'은 낯선 신입생과 유학생을 집으로 초대해 지역 문화를 소개하고, 귀갓길 안전을 챙기는 시민적 환대로 이어진다.

교회 밖 윤리는 더욱 섬세하다. '박해자를 축복'하는 태도는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는 지성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논지를 반박하되 인격을 공격하지 않으며, 사실을 확인하되 상대의 맥락을 존중한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우는' 공감은 해시태그와 릴스 저편의 실존을 상상하는 상상력이다. '마음을 같이함'은 합의가 아니라 상호 이해의 바닥을 만드는 끈기, '낮은 데 처함'은 말할 수 없는 사람을 먼저 지목해 초대하는 배려다. '지혜 있는 체하지 않음'은 모르는 분야에서는 배우고 묻는 정직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음'과 '선한 일을 도모함'은 불법 다운로드를 거부하고 크리에이터의 노동을 지불하며, 오탈자를 지적하되 조롱하지 않는 인터넷 매너로 가시화된다. '할 수 있거든 화평'은 가족 단톡방의 뜨거운 논쟁에서라도 상대의 말 한 문장을 인정하는 접점을 찾아내는 기술이다. '원수 갚지 않음'과 '배고픈 원수의 배를 채움'은 파업과 교섭, 지역 갈등과 주거 문제 같은 구조적 논쟁에서 상대의 생존 조건을 계산에 넣는 책임감으로 변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으로 악을 이김'은 학과와 회사의 관행이 악을 합리화하더라도, 작은 선을 반복해 관행의 공기를 바꾸는 장기전의 전략이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감정의 열광이 아니라 습관의 견고함이다. 사랑과 우애, 겸손과 환대, 기도와 인내, 축복과 화해는 서로 연결된 한 묶음의 미덕으로, 어느 하나가 빠져도 전체의 하모니가 깨진다. 그러니 우리는 이 미덕을 목록처럼 외우는 대신, 생활의 문장들 속에 문법으로 심어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축복을 떠올리고, 대화할 때는 존중을 먼저 실천하며, 결정의 순간에는 선을 우선한다. 그렇게 하루가 쌓이면 사람은 바뀌고, 사람이 바뀌면 공동체가 변한다. 공동체가 변하면 도시는 달라지고, 도시가 달라지면 결국 사회의 상식이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그 흐름을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른다.

결국 로마서 12장의 메시지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거짓 없는 사랑으로 시작해 선으로 악을 이겨라." 이 문장을 오늘의 시간표 위에 적어 두자. 강의실과 실험실, 도서관과 카페, 지하철과 골목, 회의실과 식탁을 오가는 모든 길에 이 문장이 조용히 따라붙도록. 선은 종종 느리고 때로 손해처럼 보인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속도의 매혹보다 방향의 진실을 택한다. 그리고 그 방향의 끝에는 부활의 새벽처럼 밝은 공기가 있다. 오늘 당신이 선택한 작은 선이 언젠가 누군가의 밤을 끝내 줄 것이다. 그 소망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그 즐거움이 우리를 부지런하게 하며, 그 부지런함이 이 도시의 습관을 조금씩 바꿔 갈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말한 대로, 교회 안의 덕목이 살아 움직이면 교회 밖의 윤리가 힘을 얻고, 교회 밖의 윤리가 빛을 발하면 교회 안의 사랑은 더욱 뜨거워진다. 그 순환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조용히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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