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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영적 예배와 동역

장재형(Olivet University 설립)목사는 예배를 단지 일정표에 적힌 종교 행사가 아니라, 성도가 살아 있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정렬하는 '영적 예배'로 이해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해 왔다. 그가 말하는 영적 예배는 인간의 감정이나 기술, 잘 짜인 순서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와 말씀의 능력이 한 사람의 마음과 공동체의 습관을 바꾸는 사건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예배의 출발점은 "무엇을 더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 앞에 서느냐"라는 질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방향 전환이며, 그 방향 전환이 한 주의 노동과 관계, 선택과 소명을 관통할 때 비로소 예배는 삶의 리듬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한국 교회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기도와 말씀 사역의 열정이야말로 세계 교회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영적 자원이라고 보면서, 그 자원이 형식에 갇히지 않도록 본질을 붙들라고 요청한다.

장재형목사가 영적 예배의 중심으로 제시하는 세 기둥은 말씀과 기도와 공동체 교제다. 말씀은 예배의 내용을 제공할 뿐 아니라 예배자의 시야를 교정한다. 성경을 깊이 관찰하고 연구하는 일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영혼의 조율이며, 자신이 선 자리와 시대의 징후를 해석하는 눈을 길러 준다. 기도는 그 말씀을 머리에서 심장으로 내려 보내는 통로로 기능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기도는 단지 요구를 나열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으며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자리다. 그리고 공동체 교제는 말씀과 기도가 개인적 체험에 머물지 않게 하는 토양이다. 서로의 삶을 나누고 중보하며 책임 있게 동행할 때, 예배는 한 사람의 열심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실함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세 요소 중 어느 하나가 약해지면 예배의 영적 역동성이 쉽게 메마른다고 지적한다.

그의 설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강조점은 회개다. 장재형목사가 바라보는 성령의 역사는 단순한 감정의 고양이나 분위기의 고조로 끝나지 않는다. 성령은 예배자에게 자신의 죄와 한계를 직면하게 하고, 그 직면이 회개라는 구체적 결단으로 이어질 때 예배는 완성된다는 관점이다. 이 회개는 자학이 아니라 복음적 통찰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지 교리가 아니라 현실의 치유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예배가 진정한 영적 전환을 낳으려면 '낮아짐'과 '헌신'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말하며, 빌립보서 2장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섬김을 예배의 윤리로 연결한다. 예배는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교만을 내려놓고 타인을 높이며 자신의 유익을 넘어서려는 습관으로 증명된다.

장재형목사의 목회적 시선은 예배를 교회 안의 내부 프로그램으로 가두지 않는다. 그는 예배가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접착제이자, 선교와 동역을 견인하는 엔진이라고 이해한다. "예배가 살아 있으면 교회는 흩어지는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그의 메시지는, 예배가 건물에 묶인 의식이 아니라 성도를 파송하는 힘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예배로 힘을 얻어 지역사회에서 봉사와 섬김을 감당하고, 더 넓게는 세계 복음 전파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적 예배는 결국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번역되며, 그 사랑은 입장문보다 앞서 실제적인 돌봄과 환대와 나눔으로 나타난다. 선교의 실천은 예배의 연장선이며, 예배 없는 선교는 쉽게 피로해지고, 선교 없는 예배는 자기만족으로 기울기 쉽다.

장재형목사는 전도서의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는 지혜와 "삼겹줄"의 비유를 통해 연합과 동역의 생태계를 설명하곤 한다. 그는 동역을 업무의 분담으로 축소하지 않고, 서로의 약함을 가려 주고 넘어짐을 일으켜 세우는 영적 관계로 확장한다. 공동체가 서로 기도하고 중보하며, 서로의 은사를 인정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때 교회는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유혹을 견디는 탄성을 얻는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연합은 교단적 슬로건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유연하게 반응하는 실천의 태도다. 서로 다른 전통과 스타일이 공존할 때 갈등이 생기기 쉽지만, 그 갈등을 대화와 기도와 말씀의 빛 아래로 가져올 줄 아는 공동체는 오히려 더 깊은 성숙을 경험한다. 그는 교파나 제도적 경계를 넘어 복음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마음의 넓이를 예배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신학 교육의 현장까지 시선을 넓힌다. 그는 신학대학원과 신학교가 단지 학문적 지식을 전달하는 기관으로 머물면, 지식이 교만을 낳고 실천이 비어 버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예배 없는 신학은 죽은 학문"이라는 그의 언어는, 신학이 곧 예배의 언어와 성도의 삶을 해석하는 도구여야 한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신학 교육의 핵심은, 말씀 연구와 영성 훈련, 그리고 목회적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 통합성이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이 강의실에서 해체되고, 강의실에서 얻은 지식이 현장에서 자랑으로 소비되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그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는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이 자기 성찰과 공동체 섬김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신학 교육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본다.

장재형목사가 공동체를 흔드는 영적 독소로 특별히 경계하는 것은 시기와 질투다. 그는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단지 고대의 비극으로 읽지 않고, 오늘도 예배의 자리와 사역의 현장에서 재현될 수 있는 인간 내면의 그림자로 해석한다. 다른 이의 인정과 열매가 내 마음의 평안을 빼앗을 때, 시기와 질투는 조용히 관계를 잠식한다. 장재형목사는 시기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교만과 결합한 영적 질병이라고 진단한다. 왜냐하면 시기는 하나님이 주신 분량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타인의 은사를 공격하거나 왜곡하게 하며, 결국 공동체의 신뢰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회는 분열의 언어를 배우고, 복음은 세상 앞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4장 7절에 담긴 경고, 곧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으나 그것을 다스릴 선택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메시지에 주목한다. 그는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는 순간을 '영적 선택의 분기점'으로 본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그 찰나에, 사람은 자신의 결핍을 하나님께 가져갈 수도 있고, 타인을 겨냥한 비난으로 돌릴 수도 있다.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첫 번째 처방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신뢰다. 은사와 달란트, 자리와 역할은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주권적 은혜의 분배라는 고백이 자리 잡을 때, 비교는 약해지고 감사는 강해진다. 그는 다른 이의 빛남을 위협으로 느끼기보다, 하나님이 공동체에 부어 주신 선물로 기뻐하는 눈을 배우라고 말한다. 그 눈이 자라면 시기와 질투가 머물 공간이 줄어든다.

두 번째 처방은 감사와 겸손의 훈련이다. 장재형목사는 감사가 영적 예배의 정서이며, 겸손이 영적 예배의 자세라고 말한다. 감사는 내가 가진 것의 출처를 하나님께로 돌려 드리는 행위이고, 겸손은 내가 가진 것을 타인을 위해 흘려보내는 태도다. 빌립보서 2장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은 장재형목사에게 단지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는 실천적 원리다. 누군가가 칭찬받을 때 나도 기뻐하고, 누군가가 열매 맺을 때 나도 감사하는 문화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예배에서 반복적으로 훈련되는 마음의 기술이며, 기도에서 다듬어지는 의지의 방향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이 훈련을 소홀히 할 때, 작은 경쟁심이 파벌과 분쟁으로 확대된다고 경고한다.

그는 신약의 여러 장면도 시기와 질투의 위험을 드러내는 거울로 사용한다. 종교적 열심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선교의 진전 앞에서 일부가 느끼는 불편함이 공동체적 소동으로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시기와 질투는 '영적 일'처럼 보이는 표정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장재형목사는 예배 인도, 찬양, 교육, 봉사, 행정 등 어떤 영역에서도 '내가 중심이 되는 마음'을 경계한다.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은 자기 영광을 갈구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공동체는 서서히 마른다. 반대로 자기 비움의 길을 택하는 성도는, 다른 이의 은사를 통해 공동체가 풍성해지는 것을 기뻐하며 그 기쁨을 다시 예배로 돌려 드린다.

이러한 영적 진단과 처방은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선교와 동역의 비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는 사도행전의 선교팀, 특히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도시를 옮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핍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동역자를 세워 확장하는 흐름을 현대 교회의 모델로 읽는다. 장재형목사는 선교를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동행'으로 바라본다. 이동하는 선교는 단지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유연성, 곧 성령이 여시는 문을 따라 가는 순종의 이동이다. 그는 한국 교회의 영적 열정이 특정 지역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유라시아와 중앙아시아, 유럽과 미주 등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이 확장은 숫자의 과시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더 깊은 제자도를 전하려는 사랑의 확장이어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특히 강조하는 선교 전략은 교육과 훈련의 장기성이다. 단기 전도가 갖는 의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현지 지도자를 세우고 신학 교육을 지원하여 스스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는 자립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신학대학원, 신학교, 그리고 다양한 교육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교육은 선교의 뿌리이며, 말씀의 깊이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는 현지 상황을 무시한 외부 중심의 모델이 아니라, 현지 언어와 문화 속에서 복음의 본질이 번역되도록 돕는 겸손한 접근을 제시한다. 선교는 가르치는 자의 우월감으로 진행되지 않고, 함께 배우는 동역의 자세로 성취된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동역의 문제를 말할 때 장재형목사는 조직의 효율보다 영적 관계의 진정성을 먼저 놓는다. 여러 교회와 선교단체, 기독교 대학이 네트워크를 형성할 때, 이해관계가 아니라 복음의 목적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교단과 교파의 차이가 곧 적대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복음에 대한 공통의 고백 위에서 서로의 자원을 나누고, 인력을 공유하며, 필요를 채우는 실천적 연합을 제안한다. 동역이 아름다운 이유는 서로 다른 은사가 하나의 선교적 방향으로 수렴될 때 나타나는 '합력의 신비' 때문이다. 그러나 동역이 어렵기도 한 이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기와 질투가 다시 고개를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그래서 동역의 시작과 끝을 예배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령의 임재 앞에서 서로의 마음을 점검하고, 말씀 앞에서 동역의 동기를 정화할 때 협력은 오래 간다.

그가 자주 언급하는 환대의 윤리 역시 선교와 동역의 실천적 형태다. 바울이 권면한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정신은, 낯선 땅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와 현지 사역자를 향한 공동체의 책임으로 확장된다. 장재형목사는 선교가 단지 강단의 구호가 아니라 생활의 언어가 되려면, 물질적 지원과 정서적 돌봄, 교육적 자원과 영적 중보가 함께 제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낯선 문화와 언어 사이에서 사역하는 이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교회가 '집'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동역의 핵심이다. 그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야손의 이야기를 통해, 복음의 일꾼을 보호하고 품는 한 사람의 결단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야손의 집이 선교의 거점이 되었듯이, 오늘의 교회도 환대의 집이 될 때 선교는 생명력을 얻는다.

영적 예배, 시기와 질투의 극복, 선교와 동역은 서로 분리된 주제가 아니라 한 줄기의 영성으로 연결된다. 장재형목사는 예배에서 성령의 빛을 받아 자신을 낮추고, 그 낮아짐으로 공동체를 세우며, 그 공동체의 연합으로 세계를 섬기는 흐름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단순하지만 깊은 역설이 있다. 교회가 강해지려면 먼저 약함을 고백해야 하고, 멀리 나아가려면 먼저 자기 중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설은 렘브란트의 명화 '돌아온 탕자'가 담아 낸 장면과도 닮아 있다. 초라한 옷차림으로 돌아온 아들의 어깨 위에 얹힌 아버지의 두 손은, 회개한 자를 정죄로 몰지 않고 회복으로 이끄는 은혜를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예배의 회개는 바로 그 품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공동체는 서로를 그 품으로 이끄는 안내자여야 한다. 시기와 질투는 형의 마음처럼 사랑을 불신하게 만들지만, 영적 예배는 다시 사랑을 신뢰하게 만든다.

장재형목사의 메시지가 오늘의 교회에 던지는 질문은 매우 현실적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가. 예배가 끝난 뒤에도 우리의 언어와 태도, 소비와 관계가 여전히 자기 중심을 향한다면, 우리는 예배의 열매를 놓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예배의 열매를 '성품의 변화'로 측정하라고 권한다. 더 많이 알고 더 크게 모이는 것보다, 더 깊이 사랑하고 더 겸손히 섬기는 것이 복음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도의 일상 속에 말씀 묵상과 기도의 습관이 뿌리내리도록 돕고, 공동체가 서로를 돌보는 구조를 세우며, 사역의 성과를 경쟁의 근거로 삼지 않도록 지도자부터 마음을 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목회는 프로그램의 설계가 아니라 영혼의 방향을 세우는 일이며, 그 방향은 예배에서 결정된다.

특히 한국 교회가 경험하는 세대 변화와 사회적 불신, 그리고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이 겪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 장재형목사의 제안은 "더 본질로 돌아가자"는 회귀가 아니라, 본질을 통해 새로워지자는 갱신의 요청으로 읽힌다. 예배와 기도의 회복은 과거의 방식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성령의 현재적 역사에 대한 기대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신학 교육을 포기하거나 축소할수록, 얕은 영성과 단편적 정보가 공동체를 지배할 위험이 커진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학대학원은 학문적 경쟁력을 넘어 영적 깊이를 갖춘 지도자를 길러내야 하고, 교회는 그 교육을 '비용'이 아니라 '미래'로 바라봐야 한다. 말씀의 토대가 단단한 공동체만이 이단적 유혹과 문화적 파도 속에서도 복음의 중심을 지킬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부흥은 숫자의 폭발이 아니라 영혼의 정화에서 시작된다. 성령의 임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겸손은 공동체를 단단하게 만들며, 단단한 공동체는 선교의 지속성을 보장한다. 부흥이란 단순히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서는 것이고, 바르게 선 공동체가 바르게 흩어질 때 복음은 더 멀리 전해진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올리벳과 같은 교육·선교 플랫폼을 포함해 다양한 사역의 형태가 존재하더라도, 그 중심이 예배와 말씀, 기도와 성령에 놓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플랫폼은 도구이지만, 영적 예배는 방향이다. 도구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방향은 변하지 않는다. 그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섬김, 곧 십자가의 길이라면, 교회는 세상의 방식으로 경쟁하지 않고도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장재형목사의 동역론이 설득력을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이상주의적 수사로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구체적 실천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는 동역을 말하면서 곧바로 시기와 질투를 다루고, 겸손과 감사를 강조하며, 환대와 나눔을 요청한다. 이는 동역이 전략이기 이전에 성품의 문제라는 통찰이다. 교회가 협력의 회의를 열기 전에 먼저 함께 기도하고, 서로의 상처를 듣고, 서로의 은사를 축복할 때 동역은 단단한 신뢰 위에 세워진다. 반대로 예배 없이 시작한 협력은 성과를 두고 다투기 쉽다. 장재형목사는 그래서 예배가 '동역의 문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예배는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게 하고, 그 고백은 인간의 공로를 낮추며, 낮아진 자리에서 진정한 협력이 시작된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영적 예배와 동역의 길은 교회가 본연의 사명을 회복하도록 돕는 통전적 로드맵이다. 말씀으로 마음을 밝히고, 기도로 욕망을 정화하며, 성령의 임재로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고, 겸손으로 시기와 질투의 뿌리를 뽑아내며, 연합의 힘으로 선교의 지평을 넓히는 흐름이 그 로드맵을 이룬다. 복음은 혼자의 열심으로 전진하지 않고, 공동체의 사랑으로 확장된다. 장재형목사는 그 사랑이 예배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며, 예배가 살아나면 교회는 다시 길을 찾고, 길을 찾은 교회는 세상을 섬길 수 있다고 강조한다. 오늘도 성도가 예배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고, 일상의 자리에서 그 마음을 실천하며, 세계를 향해 그 마음을 나누는 동역의 여정에 참여할 때, 영적 예배는 한 순간의 경험을 넘어 한 시대의 방향이 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영적 예배는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를 말씀하신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장소의 신성함이 아니라 예배자의 중심이 바뀌는 것이 핵심이며, 그 중심이 말씀의 진리 위에 설 때 성령의 역사는 감정의 파도처럼 스쳐 지나가지 않고 인격의 구조를 새롭게 짠다. 장재형목사는 그래서 예배를 '성령 체험의 순간'으로만 좁히지 않고, 예배 이후의 순종을 포함한 긴 호흡의 여정으로 설명한다. 주일 예배에서 들은 말씀이 월요일의 직장과 가정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기도 중에 받은 감동이 관계의 갈등 앞에서 어떤 선택으로 드러나는지, 공동체가 함께 드린 찬양이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열매로 나타나는지까지가 예배의 반경이다. 예배가 일상의 윤리로 확장될 때, 성도는 '교회 안의 나'와 '세상 속의 나' 사이의 이중 언어에서 벗어나 하나의 인격으로 서게 된다.

오늘의 혼란 속에서 신앙은 어떻게 현실을 견디고, 공동체는 어떻게 다시 신뢰를 회복하며, 복음은 어떻게 낡은 언어가 아니라 생명의 언어로 들리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장재형목사는 그 질문의 답을 '예배의 본질'에서 찾는다. 예배가 인간 중심의 성취 서사로 변질될수록 교회는 상처를 감추기 위해 더 화려한 장치를 찾고, 그 장치가 또 다른 경쟁을 부르며, 결국 시기와 질투가 공동체의 정서를 지배할 수 있다. 반대로 영적 예배가 회복될수록 교회는 약함을 숨기지 않고 고백하며, 고백 속에서 서로의 짐을 나누는 연대가 생겨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연합은 이런 고백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서로가 완전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불완전함을 인정하기에 오히려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이 복음의 공동체를 특징짓는다.

시기와 질투를 다스리는 실천 역시 매우 구체적이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비교가 쉬워진 시대일수록 영혼의 내비게이션이 흔들린다고 본다. 성도의 삶이 타인의 성과와 이미지에 끌려다니면, 감사는 마르고 불평은 자라며, 결국 예배마저 자기 증명의 장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세우는 '자기 점검의 기도'를 권한다. 하루의 끝에서 "오늘 내가 누구를 시기했는가, 누구의 성공 앞에서 마음이 굳어졌는가, 그 감정 뒤에 숨은 두려움은 무엇인가"를 성령께 드러내어 달라고 구하는 기도다. 그 기도는 심리적 기술이 아니라 영적 회개이며, 회개는 단지 죄책감의 증폭이 아니라 새 방향을 향한 결단이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공동체가 서로를 칭찬하는 문화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은사를 인정하는 말, 수고를 알아주는 말,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태도는 감정이 아니라 훈련이며, 훈련은 반복을 통해 습관이 된다.

선교와 동역의 확장은 결국 '사람을 세우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장재형목사가 교육 사역과 지도자 훈련을 강조하는 이유는, 복음이 제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전수되기 때문이다. 설교가 감동을 줄 수는 있어도, 성도는 결국 누군가의 삶을 통해 복음의 형태를 배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목회자와 평신도 리더가 함께 훈련받는 구조, 말씀 묵상과 기도 모임이 사역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이 되는 구조, 그리고 공동체가 지역과 열방을 향해 지속적으로 시선을 확장하는 구조를 꿈꾼다. 올리벳, Olivet University와 같은 이름으로 대표되는 교육적 플랫폼이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든, 그 플랫폼이 진정한 동역의 통로가 되려면 결국 예배의 겸손, 말씀의 깊이, 성령의 인도라는 근본 위에 서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그 근본이 흔들릴 때 사역은 커 보일수록 더 쉽게 공허해질 수 있다고 경고하며, 반대로 그 근본이 단단할 때 작은 공동체도 세계를 섬기는 넉넉한 비전을 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재형목사가 던지는 요청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초대다. 말씀을 더 깊이 읽고, 기도를 더 진실하게 드리며, 공동체 안에서 먼저 화해하고, 선교의 현장에서는 더 겸손히 배우는 삶으로 나아가라는 초대다. 영적예배가 회복될 때 교회는 다시 복음의 향기를 내고, 동역은 경쟁이 아니라 연합이 되며, 부흥은 소문이 아니라 변화로 증명된다.
장다윗목사로도 알려진 장재형목사의 메시지는 결국 성령 안에서 낮아진 교회가 세상을 섬길 때 복음이 선명해진다는 선언이다.
지금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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