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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손이 가장 먼저 내밀어졌다 —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렘브란트가 붓 끝으로 평생 물었던 것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은 생애 마지막 시간을 한 장면 앞에서 보냈다. 〈돌아온 탕자〉. 노년의 그는 시력이 점점 흐려져 가면서도 이 캔버스로 거듭 돌아왔다. 완성된 그림 앞에 서면, 빛이 흘러드는 방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빛은 왕좌를 향하지 않는다. 금관을 비추지도 않는다. 누더기를 걸친 탕자의 등 위로, 그리고 그 아들을 감싸 안는 늙은 아버지의 두 손등 위로 황금빛이 조용히 번진다. 그 손은 눈먼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아들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판단하지 않고, 묻지도 않고, 그저 감싼다.

미술사가들은 그 손을 두고 오랫동안 이야기해 왔다. 두 손이 서로 다르게 그려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들이 있었다. 한 손은 굵고 강인한 남성의 손이고, 다른 손은 부드럽고 가느다란 여성의 손에 가깝다. 렘브란트가 의도했든 아니든, 그 손 안에는 엄격함과 자애로움, 정의와 용서가 동시에 담겨 있다. 신학자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 앞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다가, 결국 한 권의 책을 써냈다. 은혜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를, 렘브란트는 붓 끝으로 평생 묻고 또 물었다.

고린도후서 8장을 펼치면 그 그림이 다시 떠오른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는 이 본문 앞에서 오늘의 교회를 향해 날카롭고도 다정한 질문을 건넨다. "복음이 현실이 될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렘브란트의 그림 앞에 서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듯, 그 질문은 한번 귀에 들어오고 나면 오래도록 머문다.

 


가난이 끝내 기쁨을 이기지 못한 이유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소개하는 마게도냐의 교회들 -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레아 - 은 결코 넉넉한 공동체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속주 체제 아래 경제적 압박을 고스란히 받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냉대와 산발적 박해를 일상처럼 감내해야 했던 이들이었다. 이 공동체들을 묘사하는 바울의 언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역설이다. "극심한 가난"과 "넘치는 기쁨"이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인다(고후 8:2). 세상의 문법으로는 성립하지 않는 조합이다. 가난한 사람은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고, 시련 속의 공동체는 안으로 웅크러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그러나 마게도냐의 교회들은 웅크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을 스스로 내어놓았다고, 바울은 기록한다.

장재형 목사가 설교를 통해 거듭 짚어내는 핵심이 바로 이 지점이다. 마게도냐 교회의 헌신은 도덕적 결단의 산물이 아니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전략적 투자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받은 은혜에 압도된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흘러넘친 결과였다. 바울은 이 현상의 뿌리를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케노시스(kénosis)에서 찾는다. 부요하셨던 분이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는 복음의 핵심 사건이, 마게도냐 교회의 작은 헌금 봉투 속에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다.

헌신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의무가 아니라 반응이다. 먼저 은혜에 사로잡힌 사람은 나누라는 설교 없이도 쥐고만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복음의 현실화'라는 개념으로 집약하는 신학적 통찰의 정수다. 복음이 삶의 언어로 번역될 때, 교회는 비로소 살아 숨 쉬는 공동체가 된다. 교리가 아니라 체온으로, 선언이 아니라 손길로.

 


헌신이 흐르면 강이 된다

 

고린도후서 9장에서 바울은 연보 행위를 '착한 일'이라 부르며, 그것이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착한 일은 단순한 도덕적 선행이 아니다. 한 공동체의 헌신이 다른 공동체의 감사 기도를 낳고, 그 기도가 또 다른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살아있는 영적 순환의 구조다. 마게도냐 교회의 이야기를 바울이 굳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 교회의 은혜가 다른 교회의 도전이 되고, 그 도전이 다시 온 공동체의 성숙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바울은 교회들 사이에 그 흐름이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이 성경 묵상을 현대 교회의 현실로 풀어내며,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 활동이 종종 프로그램과 이벤트의 논리에 갇힌다는 점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짚어낸다. 프로그램은 끝나면 멈추지만, 은혜에서 출발한 헌신은 멈추지 않는다. 감사를 낳고, 기도를 낳고, 더 깊은 헌신으로 이어지는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 교회는 비로소 영적 생태계가 된다. '좋은 일을 하는 단체'와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공동체' 사이의 거리는, 외형이 아니라 동력의 출처에서 결정된다.

빌립보 교회는 그 순환의 가장 아름다운 증거였다. 그들은 바울의 선교 여정 내내 곁을 지켰고, 그 동행은 단순한 재정 지원이 아니라 복음 사역의 진정한 공동 참여였다. 복음을 진정으로 체험한 공동체는 그 복음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흘려보낼수록 더 풍성해지는 은혜의 역설을, 빌립보 교회는 신학 강의실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증명했다.

 


세상이 멈추어 묻는 질문 앞에 서다

 

소비주의와 극단적 개인주의가 공기처럼 퍼진 오늘의 세계에서, 헌신하는 공동체는 낯선 풍경이다. 가진 것을 내어놓는 사람은 계산이 느리거나 어리석은 사람처럼 여겨지고, 자신을 비우는 삶은 패배처럼 읽히는 시대다. 그러나 바로 그 낯섦 자체가 복음의 증거가 된다. 초대 교회가 로마 제국의 주목을 받은 것은 화려한 건물이나 탁월한 조직력 때문이 아니었다. "저들은 왜 저렇게 서로를 사랑하는가"라는, 세상이 멈추어 던진 질문 때문이었다. 그 질문이 곧 복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오늘의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겨냥한다. 우리는 복음을 말하는가, 아니면 복음을 살아내는가. 두 질문 사이의 간극이 곧 교회의 신뢰를 결정한다. 은혜의 체험이 깊어질수록 헌신은 의무의 언어에서 감사의 언어로 바뀐다. 그때 교회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교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로 흐르는 통로가 된다. 사람들은 그 통로 안에서 세상이 끝내 줄 수 없는 기쁨을 발견하고, 그 기쁨의 출처를 묻기 시작한다. 그 질문이야말로 복음이 세상으로 열리는 문이다.

마게도냐의 가난한 교회들이 내밀었던 그 빈손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향해 말없이 묻고 있다. 복음이 당신 안에 살아있다면, 지금 당신의 손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렘브란트의 빛이 언제나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내렸듯, 복음의 능력은 비움으로부터 시작되고, 내어줌으로써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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