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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열심이 혹시 당신을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ㅣ 장재형목사(올리벳대학교)

꼿꼿이 선 아들, 빛이 끝내 닿지 않은 얼굴

암스테르담의 어둑한 전시실, 렘브란트의 캔버스 앞에 서면 대부분의 눈길은 왼편으로 먼저 달려갑니다. 무릎을 꿇은 아들, 그 여윈 등 위에 조심스럽게 포개진 아버지의 두 손, 화폭 전체를 감싸는 황금빛 온기. 그러나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화면 오른편에 있습니다. 팔짱을 낀 채, 빛이 비껴가는 자리에 꼿꼿이 서 있는 맏아들. 단 하루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고, 새벽마다 밭을 갈며 성실을 증명해 온 사람. 그러나 렘브란트의 붓은 그 근면한 얼굴에 따스함 대신 차가운 그늘을 드리웁니다. 집 안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품 안에는 없는 사람. 율법을 지키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 이 그림 한 장이, 로마서 10장 전체를 소리 없이 압축합니다.

불꽃처럼 뜨거웠으나, 방향이 틀린 열심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을 냉정한 교리의 언어로 열지 않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이것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 눈앞에서 길을 잃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통곡이며, 목자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애통함의 언어입니다. 9장에서 바울은 이미 고백했습니다.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동족의 구원을 위한다면 기꺼이 그리하겠노라고. 그의 설교와 서신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냉철한 신학의 논리가 아니라, 불타는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이 대목을 해석하면서, 바울의 탄식이 단순한 민족적 감정이 아니었음을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은 언약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열심은 불처럼 타올랐으되, 그 불꽃의 방향이 처음부터 틀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한 채 자기 의를 세우려 했고, 그 결과 정작 하나님의 은혜 앞에 복종하지 못하는 역설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 역설의 살아있는 증인이었습니다. 회심 이전의 그는 당대 최고의 신학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고, 누구보다 율법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복음을 박해하는 에너지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이 지점에서 오늘의 성도들을 향해 정직하고 서늘한 물음을 던집니다. 예배 출석, 교회 봉사, 신앙의 연륜이 오히려 십자가의 은혜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는 경고는, 성경 묵상을 오래 이어온 이들의 가슴속에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긴장감을 남깁니다.

말씀은 하늘 끝에 있지 않다, 당신의 입술 바로 곁에

바울은 신명기 30장을 인용하며 복음의 본질을 선언합니다. 구원은 하늘 끝까지 올라가야 얻을 수 있는 것도, 깊은 바다를 헤쳐야 건져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은 이미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고. 그런데 왜 이스라엘은 그토록 가까운 길을 끝내 찾지 못했을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자기 의라는 눈가리개 때문입니다. 스스로 의롭다는 확신이 강할수록,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자리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렘브란트의 맏아들처럼, 집 안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잔치에 끝내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신학적 통찰을 오늘 교회의 언어로 번역합니다. 오랜 신앙의 연륜과 깊은 성경 지식이 오히려 복음 앞의 겸손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진정한 은혜는 내가 얼마나 잘 지켜왔는가의 기록부 위에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연약함과 죄인 됨을 인정하는 그 고백의 순간에 임한다고. 성경 묵상이 나의 지식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 나의 교만을 무너뜨리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 이것이 이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요청하는 첫 번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결단입니다.

마음이 먼저 무너질 때, 비로소 입술이 열린다

로마서 10장 9절은 구원론의 심장 박동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에서 순서에 주목합니다. 입술의 고백은 마음의 확신이 충만해진 뒤에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예배당의 의례적 응답이 아니라, 심령 깊은 곳에서 예수님이 나의 주이심을 온전히 아는 그 앎이 구원의 씨앗이라고.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과거의 모든 자랑을 배설물처럼 여긴다 고백했을 때, 그것은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의 내면이 철저히 재편되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구원의 문은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혈통도, 봉사의 연륜도, 출석 연수도 이 문의 열쇠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 이것이 신약 복음이 품은 혁명적 선언이며,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매번 힘주어 되새기는 은혜의 보편성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전하는 자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는 이사야의 탄성처럼, 복음의 전파는 교회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그 자체입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을 들었으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거대한 실패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거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습니까. 단지 귀로만 들은 것을 넘어, 그 복음이 우리의 자기 의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까. 렘브란트가 캔버스에 담아낸 그 아버지는 지금도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서 있습니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 의를 내려놓고 그 품 안으로 한 걸음 걸어 들어가는 일만이,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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