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가운 대리석 위에 내려앉은 어머니의 침묵은, 죽음이 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보여 주는 슬픔은 무너진 육체 앞에서도 이상하게 고요한 빛을 품고 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 설교가 붙드는 요한복음 19장 31-42절도 바로 그 고요한 자리, 십자가 이후의 시간을 바라본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안식일을 준비하고, 시신을 거두며, 뒤늦은 사랑을 드린다. 그러나 복음은 그 모든 장면 속에서 죽음보다 깊은 은혜와 참된 안식이 이미 열리고 있음을 보게 한다.
십자가 이후의 시간은 사람의 언어가 쉽게 들어설 수 없는 시간이다. 고통은 끝났지만 슬픔은 끝나지 않았고, 예수님의 죽음은 확인되었지만 그 죽음의 의미는 아직 모두에게 열리지 않았다. 바로 그 사이에서 요한복음은 서두르지 않고 한 장면씩 보여 준다. 군병의 손, 유대인들의 요청, 창에 찔린 옆구리, 새 무덤을 준비한 숨은 제자들의 움직임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의 성취를 조용히 드러내신다.
예비일의 어둠 속에서 복음의 안식이 밝아진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이 일어난 날을 예비일로 기록한다. 그 안식일은 큰 날이었고, 유대인들은 해가 지기 전 십자가의 시신을 치워야 한다고 여겼다. 신명기 21장 23절의 규정처럼 나무에 달린 자를 밤새 두지 않으려는 율법적 엄격함이 그들의 판단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 엄격함은 십자가 위의 고통을 끝까지 헤아리지 못한 채, 다리를 꺾어 죽음을 앞당기려는 잔혹한 요청과 함께 있었다.
로마의 십자가형은 죽음 이후에도 모욕을 남기는 형벌이었다. 시신을 오래 방치하는 관습 속에서 인간의 존엄은 쉽게 짓밟혔다. 유대인들은 그런 방식을 그대로 두면 거룩한 땅이 더럽혀진다고 여겼고, 그래서 더 빨리 죽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했다. 거룩을 지키려는 말이 생명을 압박하는 폭력과 결합되는 이 장면은, 종교적 형식이 얼마나 깊은 자기모순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이 설교는 신앙의 열심이 언제든 사랑을 잃을 수 있음을 비춘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사람들은 정작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두고 있었다. 겉으로는 율법을 붙들었지만, 그 율법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의 길은 보지 못했다. 참된 성경 묵상은 바로 이 모순 앞에서 우리 자신을 멈추게 한다. 믿음이 형식만 남고 사랑을 잃을 때, 가장 경건한 말도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 아니라 사람을 몰아내는 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모순 속에서도 구원의 길을 여신다. 금요일의 고난은 안식일의 침묵으로 이어졌고, 그 침묵은 절망의 정지가 아니라 부활을 향한 깊은 준비가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율법적 안식의 외피를 넘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풀려나는 메시아적 안식의 문을 열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십자가 이후의 시간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시작임을 강조한다.
꺾이지 않은 뼈가 증언한 은혜의 길
군병들은 함께 못 박힌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지만, 예수님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미 숨을 거두신 주님의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출애굽기 12장 46절과 민수기 9장 12절에 나타난 유월절 어린양의 규정이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요한복음은 분명히 보여 준다. 나무에 달린 저주의 죽음처럼 보였던 십자가가, 실상 율법 전체가 바라보던 구원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복음은 인간의 눈과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신속히 처리해야 할 문제로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 죽음 안에서 말씀의 성취를 이루고 계셨다. 뼈가 꺾이지 않은 어린양은 죄인을 위한 대속의 표지가 되었고, 더 이상 반복되는 제사 제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열리는 새 언약의 길을 가리켰다. 신학적 통찰은 멀리 있는 추상이 아니라, 이처럼 상처 입은 몸 위에서 말씀의 깊이를 읽는 일이다.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는 말씀 또한 십자가의 장면을 예언의 성취로 읽게 한다. 찔림은 패배의 흔적처럼 보이지만, 요한복음 안에서는 메시아의 정체를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가장 참혹한 상처가 가장 선명한 은혜의 표지가 되는 이 역설 앞에서, 회개는 단지 후회의 감정이 아니라 찌른 자를 바라보며 마음의 방향을 돌이키는 사건이 된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실패한 의인의 마지막이 아니라, 율법이 가리키던 모든 표지가 한 몸에 모이는 자리다. 인간은 그분을 저주받은 자처럼 세웠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길을 완성하셨다. 예수님의 몸은 폭력의 대상이 되었으나, 동시에 구원의 말씀을 증언하는 몸이 되었다. 이 복음 앞에서 은혜는 추상적 위로가 아니라 죄인을 대신해 꺾이지 않은 어린양의 실제가 된다.
피와 물이 흐른 자리에서 믿음은 새로워진다
한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 설교는 그 장면을 단순한 생리적 현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피는 죄 사함을, 물은 정결과 생명의 은혜를 가리킨다. 교회 전통 안에서 물과 피는 세례와 성만찬의 의미로 이해되어 왔고,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속죄와 새 생명을 동시에 열어 주었다는 사실을 묵상하게 한다.
피와 물은 죽음을 확인하는 창끝에서 흘러나왔다. 사람의 눈에는 마지막 확인이었지만, 믿음의 눈에는 생명의 시작이었다. 예수님은 자기 안에 남은 것까지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 다른 복음서가 전하는 성소 휘장의 찢김처럼, 십자가는 더 이상 멀리서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은 단지 일을 멈추는 시간이 아니다. 죄책의 무게에서 풀려나고, 하나님과 화목하며, 부활의 소망 안에서 새롭게 숨 쉬는 자리다. 장재형 목사의 성경 묵상은 이 안식을 관습의 일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혜의 현실로 읽게 한다. 십자가 이후의 침묵은 비어 있는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을 준비하시는 충만한 침묵이다.
히브리서 10장 19절이 말하는 담대함도 이 지점에서 새롭게 들린다. 인간이 스스로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가 길이 되었다. 그래서 십자가 이후의 안식은 책임을 회피하는 평온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사람의 깊은 자유다. 믿음은 그 자유를 값싼 감정으로 소비하지 않고, 피와 물이 흘러나온 자리 앞에서 자신이 받은 은혜의 무게를 조용히 헤아린다.
늦은 사랑 앞에서도 소망은 무덤을 넘는다
요한복음 19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 청하고 몰약과 침향, 세마포와 새 무덤으로 주님을 정성껏 장사한다. 늦었지만 용기 있는 헌신이었고, 두려움 너머로 한 걸음 나온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들의 섬김은 아름답지만 아쉬움도 남긴다. 살아 계신 예수님께 더 일찍 드릴 수 있었던 사랑이, 죽음 이후의 장례에서야 드러났기 때문이다. 값비싼 향품과 깨끗한 세마포는 존귀한 예우였지만, 이미 주님의 귀에 직접 닿는 위로는 될 수 없었다. 이 설교는 여기서 오늘의 순종을 묻는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헌신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교제인지, 아니면 죽은 신앙을 정성스럽게 장식하는 종교적 예법인지 돌아보게 한다. 사랑은 마음의 진심만이 아니라, 때를 놓치지 않는 응답이다.
그러나 복음은 늦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지나간 침묵을 되돌릴 수 없었지만, 남은 자리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을 드렸다. 하나님은 그 결단마저 성경 안에 남기셨고, 새 무덤은 곧 부활의 증거가 될 자리가 되었다. 인간은 장례를 준비했지만 하나님은 새 창조를 준비하고 계셨다. 세마포가 남은 무덤은 죽음이 마지막 주인이 아님을 조용히 증언한다.
새 무덤은 단지 장례의 장소가 아니라, 죽음과 생명이 맞닿는 경계가 된다.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어떤 죽음과도 섞이지 않고 드러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이 말하는 새 피조물의 소망도 이 장면과 맞닿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오래된 죄의 질서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부활의 아침을 향해 부름받은 새 생명의 사람이 된다.
십자가 이후의 세계는 끝난 세계가 아니라 열리는 세계다. 율법은 사랑 안에서 완성되고, 안식은 형식이 아니라 화목의 선물로 주어진다. 우리가 미루어 온 순종, 감추어 온 믿음, 말하지 못한 사랑도 십자가 앞에서는 더 이상 숨을 곳을 찾지 못한다. 오늘 살아 계신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을 내일의 무덤 앞에 남겨 두지 않는 것, 그것이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조용히 붙들어야 할 회개와 소망의 길이다.
장재형 박사는 현장 선교와 디지털 미디어 사역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해 왔으며, 그 사역의 열매로 지상명령에 헌신하는 많은 이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선교적 비전을 바탕으로 올리벳은 처음에 선교사 훈련을 위한 작은 교회 학교로 출발했다. 이후 보다 체계적인 신학 교육과 선교 인재 양성을 위해 2000년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에 올리벳신학대학 및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가 성장하면서 장 박사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에 Olivet University를 공식 설립했다. 올리벳은 샌프란시스코의 다양성과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신학을 중심으로 음악, 저널리즘, 예술디자인, 기술 분야까지 교육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윌리엄 와그너 박사를 비롯한 교수진을 영입하며 교육 역량을 강화했고, 2005년에는 옛UC 버클리 다운타운 익스텐션 캠퍼스로 이전해 대학으로서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2006년 장박사는 선교 사역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총장직을 데이비드 제임스 랜돌프 박사에게 이양하고, 국제총장으로서 세계 선교 사역을 이끌었다. 이후 Olivet University는 2009년 기관 인증을 받았으며, 언어교육대학과 경영대학을 추가하고 학위 과정과 국제 협력 관계를 확대하면서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